클로드 모네 : 양산을 든 여인 2

IV. 색채 분할

대상의 고유한 색채를 부정하고 눈에 비치는 대로 빛나는 자연을 그리려 했던 인상파 화가들은 이를 위해 그때까지 없던 특수한 기법을 발명했다. 그것은 가느다란 풀잎의 뒷면이나 옷의 주름 구석에까지 비쳐드는 미묘한 태양 빛의 반짝임을 그대로 화면에 재현하는 것과, 더 나아가 미묘한 빛의 색뿐만 아니라 밝은 광채까지 표현하려는 두 가지 야망을 동시에 달성하는 기법이었다.

태양의 반짝임을 그대로 화면에 붙잡으려면 태양 빛의 색으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언뜻 보기에는 백색광으로 보이는 태양 빛이 분석해 보면 무지개의 일곱 색을 포함한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광학 이론의 발달이 이 현상을 한층 더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인상파 화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무지개의 일곱 색 사용을 원칙으로 했다. 그것은 빨강·파랑·노랑의 삼원색, 그리고 그 삼원색을 각각 두 가지씩 섞었을 때 생겨나는 주황 · 보라 • 초록의 제1차 혼합색을 팔레트의 중심에 두고 어두운 색채를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상파의 화면은 이전의 화면에 비해 아주 밝게 빛났다. 실제로 어떤 미술관에 가더라도 19세기 바르비종파나 쿠르베, 마네 등의 작품이 걸린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실로 들어가면 갑자기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밝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상파의 첫 번째 원칙은 원색주의다. 두 번째 원칙은 그러한 섞이지 않은 색채들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즉 서로 섞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다. 종래의 회화 기법에서는 중간색을 내기 위해 여러 종류의 물감을 섞는 것이 상식이었다. 자연의 세계는 기성품 물감의 색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성품 물감에 없는 색을 실현하려면 팔레트 위에서 그 색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당시 광학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은 물감을 섞으면 밝기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밝은 빛을 가진 무지개의 일곱 색 물감을 차례차례 섞다 보면 색은 점점 어두워져서 마침내 완전한 검정이 된다. 실제로 삼원색을 섞으면 검정이 나온다. 그러나 무지개의 일곱 색깔의 빛을 차례차례 섞으면 마지막에는 백색광이 된다. 원래 무지개의 일곱 색이라는 것은 태양 빛을 분해하여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물감을 섞는 것은 밝게 빛나는 자연과는 역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이 가능한 한 물감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상태로 사용하려 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중간색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네는 이에 대하여, 섞어야 할 색을 따로따로 작은 터치로 화면에 병렬하는 해결법을 생각해냈다. 그렇게 하면, 작은 터치이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개개의 터치는 보이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 섞여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물감 하나하나가 따로 놓여 있기 때문에 밝기는 유지된다. 물감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물감에서 나오는 빛이 눈속에서 섞이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를 ‘시각 혼합’ 또는 ‘망막상의 혼합’이라고 불렀다. 이 시각 혼합을 가져오는 묘사 기법이 바로 색채 분할이다.

<양산을 쓴 여인>에서도 화면 아래쪽 풀밭의 묘사가 색채 분할의 좋은 예다. 여러 가지 색의 터치가 그대로 화면에 병렬되어 있다. 그림자 부분에서조차 녹색과 빨강의 터치가 아주 분방하게 배열되어 있다. 여름의 풀밭 이 덥게 느껴질 정도로 다채로운 빛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색채 분할 또한 하나의 기법이다. 화면에 흩어진 무수한 터치는 자연의 환영을 주기는 하지만 자연 그 자체는 아니다. 모네는 “내 작품은 자연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말했는데, 이 창에서 보이는 세계는 그 나름으로 하나의 허구적 자연일 뿐이다. <양산을 쓴 여인>은 인상파 최후의 그룹전이 열린 1886년에 그려졌는데, 이 무렵부터

모네의 세계는 세세한 터치로 표현되는 빛의 홍수 속으로 빠져든다. 사실 이 이후로 명확한 형태 파악이 필요한 인물상은 모네의 화면에서 사라지고 만다.

V. 역사적 배경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파리 번화가의 식료품 가게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일가가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로 이사했기 때문에, 영국해협에 면한 이 해변 마을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 다. 멀리 펼쳐진 하늘과 물의 세계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수성은 이 시절에 길러진 것 같다.

이 르아브르에서 소년 모네는 보들레르를 경탄하게 한 해경화의 화가 외젠 부댕을 알게 되었다. 모네가 화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오로지 부댕의 지도 덕분이다. 열여덟 살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간 이후에는 거의 혼자 힘으로 자신의 길을 열어가야 했다.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미술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르누아르, 피사로 등과 함께 인상파 그룹을 결성하고 근대 회화의 역사를 크게 바꾸는 데 공헌하면서, 끝까지 자기고 유의 비전을 캔버스 위에 전개해 갔다.

<양산을 쓴 여인>의 모델은 당시 모네와 친했던 알리스 오셰데의 딸 수잔 오셰데라고 한다. 그 무렵 모네는 첫 번째 아내 카미유 동시외와 사별하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 작품을 그리고 나서 6년 후 알리스 오셰데 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만년의 모네가 파리 교외 지베르니의 집 정원의 수련 연못에서 자신만의 화려한 빛의 세계를 계속해서 추구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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