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인제도의 의의

I. 의의

국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성립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국 가가 있는가 하면, 식민지에서 독립을 달성한 국가도 있다. 구 소련의 분열과 같이 기존의 한 국가에서 여러 국가가 분리되어 나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남북 예멘 의 통합과 같이 복수의 국가가 하나로 합쳐지는 경우도 있다. 보통 국가가 성립되면 다른 국가로부터 승인(recognition)을 받고, 양국간에는 외교관계가 개설되어 국 제관계를 맺어 나가게 된다. 여기서 승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승인은 일목요연한 설명이 어려운 주제 중의 하나이다. 승인은 국제법상의 제 도이나 실제 승인의 부여는 국제정치적 고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즉 대상이 승인의 요건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법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 의만으 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단 승인이 부여되면 일정한 법적 효과가 발생한다. 각국 마다 승인정책이 다양하며, 동일한 국가라 하여 반드시 일관된 정책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특히 정부 승인은 객관적 제도라기보다는 해당정부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표시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다 보니 승인은 국제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신생국이 주요 국가로부터 신속하게 승인을 받는 것은 국가의 안정 에 기여하게 된다. 19세기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 미국 이나 영국의 승인을 받느냐 여부가 독립운동의 성공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1) 한편 승인이란 용어는 국가나 정부의 승인 외에 다른 국제법상 상황에 대하여 도 자주 사용되어 혼선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1국의 새로운 영유권의 취득 승인, 외국 법률이나 판결의 승인과 같이 국제법상의 다른 권리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승 8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본 항목에서는 물론 국가와 정부의 승인만을 다룬다.

승인과 외교관계의 수립은 법적으로 별개의 제도이나, 현실에 있어서 양자는 잘 구별되지 아니한다. 현대의 관행상 승인이 부여되면 거의 동시에 외교관계가 수립된다. 승인만 부여되고 외교관계의 수립이 지연되는 경우에는 대개 특별한 정치 적 사정이 개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은 북한을 승인한 후 장기간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한편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이 승인의 취소나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II. 이론적 대립

승인의 의미에 대하여는 국제법의 어느 분야보다도 날카로운 이론적 대립이 존재한다. 승인에 대한 이른바 창설적 효과설(constitutive theory)의 입장은 승인이란 피승인국에 대한 국가로서의 자격부여 행위라고 본다. 즉 국가는 승인을 받아야만 법적으로 존재하게 되며, 승인을 받기 이전에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신생국인 갑(甲國)에 대하여 을(乙)은 승인을 부여하였으나, 병국(丙國)은 승 인을 하지 않았으면, 병국(丙)은 갑(甲)을 국가로 대우할 의무가 없다는 이론이다.

반면 선언적 효과설(declaratory theory)의 입장은 국가가 사실로서 성립하면 타 국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승인이란 이러한 사실을 확 인하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승인이란 그 이전까지 독립국가로서의 존재가 불확실하던 것을 객관적 사실로서 확인하는 의미를 지니는 정도라고 이해한다. 위 와 같은 창설적 효과설과 선언적 효과설 사이의 절충적 입장도 있으나 승인을 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위의 2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창설적 효과설은 국가가 국제법상 권리의무의 근본 원천이라고 보는 입장에 근거한다. 국가는 자신이 승인한 국가에 대하여만 국제법상의 의무를 부담한다는 것이다. 국제사회를 일종의 폐쇄된 클럽으로 상정하고 기존 회원의 동의 하에만 새로운 회원의 가입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반면 선언적 효과설은 개별국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제법 질서가 존재함을 인정하며, 국가를 국제법 제도 속의 존재로 인식하는 입장이다. 국가는 국가성 (statehood)만 갖추면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국제법의 주체로 인정된다.

오늘날 국가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타국에 대한 승인을 보류함으로써 그 국가에 대한 국제법적 의무로부터 마음대로 벗어날 수는 없다. 동일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행동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특정 시점에 일정 한 실체가 국제법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와 ‘아니오’라는 답이 동시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설적 효과설은 국제사회의 실정과 부합되 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순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 승인에 관한 날카로운 이론적 대립이 있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승인제도의 역사적 발전이란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승인에 관한 최초의 사례는 네덜란드 독립에 대한 스페인의 승인이었다. 네덜 란드는 이미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국제적으로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1648년 웨스트팔리아 체제의 성립을 통해서였다. 30년 전쟁을 마무리한 웨스트팔리 아 조약은 여러 신생국의 탄생을 인정하고, 유럽의 국경을 새로이 획정하였다. 이후 이 합의의 결과를 훼손하는 새로운 독립국의 등장은 기존 국가들의 동의를 받지 못 하는 한 위법하다고 평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5년 비엔나 최종의정서에 의한 유럽의 질서 재편에 대하여도 동일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신생국의 출현은 합 의된 세력균형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였으므로, 당시 신생국은 승인을 받 아야만 유럽국가의 일원으로 정식 인정될 수 있었다. 미국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영국은 본국의 승인이 없는 한 혁명이나 전쟁을 통한 신생 독립국으로의 성립은 법 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미국이 국가로서 실효적으로 성립 하면 승인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비교적 조기에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후 유럽세력의 세계 진출이 본격화되자 이들은 유럽국가간의 공법(公法)으로 출발하였던 국제법을 이른바 문명국가간의 법으로 새로이 개념지으며, 비유럽지역 은 문명국가가 아니며 국제법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광대한 비유럽지역을 법적으로 무주지로 간주하고 선점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비유럽지역은 승인을 통하여만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이 때의 승인은 창 설적 효과를 가져왔다. 결국 승인제도는 당시 유럽세력의 제국주의적 영토확장의 결과를 합법화시켜 주는 이론적 도구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중남미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신생국에서 혁명이 빈발하자 선진 강대 국들로서는 현지에 투자된 자국 자본의 보호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들은 신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충분히 보호할 것인가를 승인 부여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 았고, 승인을 통해서만 상대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제법 에서 승인제도에 대한 논의가 이론적 중요성을 갖고 자리잡은 것이 19세기였다는 사실은 승인제도가 당시 무엇을 위하여 봉사하였는가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에는 더 이상 무주지 선점의 대상이 없으며, 대부분의 신 생국의 출현 여부는 국가가 객관적으로 성립되었는가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승인을 받기 전의 국가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국제사 회를 기존 국가들의 폐쇄된 클럽으로 보는 시각은 유럽 중심의 지나간 역사관의 산 물일 뿐이다. 또한 한 국가가 타국에 대한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그 국가와의 관계 에서 국제법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주장은 국제사회에 대한 부정과 다름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승인은 선언적 효과만을 지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론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에서는 선언적 효과설과 창설적 효과설의 차이가 크지 않을지 모른다. 선언적 효과설은 국가의 성립이란 객관적 사실의 문제이고 승인은 이러한 사실의 확인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단지 사 실의 확인문제로만 인식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판단이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성립을 객관적으로 인증해 주는 제도가 없으므로 특정한 실체가 국가성을 갖추었 느냐에 대한 판단은 결국 개별국가가 하게 된다. 따라서 타국에 대한 승인을 부여함에 있어서도 개별국가는 일정한 재량을 행사하게 되며, 이 때 각국의 판단과 행 동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승인은 어느 정도 창설적 효과를 내 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성립 여부가 논란이 되는 경우 승인은 국가 성립에 관한 결정적 증거가 되기도 하며, 반면 불승인은 문제의 국가의 국제적 활동을 봉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냉전시대에 북한 또는 남한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고 이를 정 식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도 많았다. 이 경우의 승인 역시 일정 부분 창설적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구 유고연방을 구성하던 지방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 하였을 때, 이들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비교적 이른 시기의 국가승인은 독립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었다. 이러한 승인이 없었다면 독립을 성취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의 승인은 현실에 있어서 창설적 효과를 발휘한 것이 사실이다. 선언적 효과설이 승인을 객관적 사실의 확인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승인의 부여 여부 는 개별국가의 정치적 판단에 입각한 재량행위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자기 모순이다. 한편 창설적 효과설의 입장 역시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승인의 의 무개념을 전제로 한다면 선언적 효과설의 입장과 실제로 별 차이가 없게 된다.

창설적 효과설은 국가의 성립이란 사실에 대하여 통일적 판단기구가 없기 때 문에 각국이 나름대로의 판단하에 이를 달리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 현재의 국제법 질서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 이는 국제법 체제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였다는 취약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선언적 효과설이 합당 한 것 같으나, 창설적 효과설도 여전히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결국 승인제도는 국제법 체제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중요성이 보다 강조되게 된다.

한편 창설적 효과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승인의 의무를 인정함으로써 이 이론의 약점을 벗어나려 한다(예: Lauterpacht, Guggenheim 등). 즉 일정한 실체가 국가로서의 요건을 갖추면 타국은 이를 승인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승 인의 의무라는 개념을 통하여 승인의 정치적 자의성을 극복하고, 승인을 거부함으 로써 국제법적 제약에서 해방된다는 비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창설적 효 과설은 승인을 받기 이전에는 국가로서의 법인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인데,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에 대하여 승인의 의무를 지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승인의무 론을 인정하는 국제사회의 관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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