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한 형태의 국가
I. 피보호국
국제법상 보호관계는 제국주의 시절 강대국의 세력확장의 수단으로 종종 사용 되었다. 보호관계란 조약을 통하여 보호국이 외부의 침략이나 다른 압박으로부터 피보호국을 보호하기로 약정하고, 보호국이 피보호국의 대외관계를 대신 처리하기 로 하는 관계이다. 구체적인 보호관계의 내용은 보호조약의 내용에 의하여 결정된 다. 조약에 따라 보호국이 피보호국의 일체의 외교관계를 장악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정한 범위의 중요한 외교권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완전한 보호관계가 설정되면 보호국은 자신의 권리로서 피보호국민을 위한 모든 외교적 보호권을 행 사하게 된다.i
피보호국이 되어도 국제법상의 국가의 자격을 상실하지는 않으며, 일단 독립 된 국제법 주체성은 유지된다. 즉 피보호국은 자국내 영토관할권을 계속 행사하며, 기존의 국내법 질서도 유지된다. 피보호국 국민의 국적도 변함이 없다. 보호국이 제 3국과 전쟁에 돌입하여도 피보호국이 당연히 교전국의 지위에 처하지는 않는다. 피보호국은 오직 외교에 관한 능력만을 제한받는다.
보호관계는 보호국과 피보호국간의 양자조약을 근거로 성립되므로, 제3국이 보호관계를 무조건 승인할 의무는 없다. 따라서 피보호국을 대신한 보호국의 외교 활동을 제3국이 반드시 승인하여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열강은 그 결과를 승인하고 대한제국에 파견하였던 자국의 외교사절들을 철수시켰다(일부는 영사관으로 잔류). 일제는 대한제국의 해외공관도 폐쇄하였다.
보호관계는 이후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양국간 완전한 종속관계 또는 병합으로 변화될 수도 있고, 반대로 보호관계가 해제되어 피보호국이 정상적인 외교능 력을 회복할 수도 있다. 오늘날 피보호국이란 국제법의 무대에서 사실상 사라지고 있는 제도이나, 아직도 모나코는 프랑스의, 산마리노는 이탈리아의, 시킴은 인도의 피보호국이다.
II. 국가연합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조약을 통하여 일정한 국가기능을 공동으로 행사하기로 한 국가간의 결합을 국가연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 는 인접국가가 공동의 국방정책 수행을 위하여 국가연합을 결성할 수 있다. 국가연 합은 설립조약이 부여하기로 한 범위 내에서만 국제법적 능력을 가지며, 국가연합 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독자적인 국제법상의 법인격을 갖지 못한다. 오직 연방만이 대외적으로 국가로 인정되는 연방국가와는 달리, 국가연합의 소속국은 계속 독립국 가로 남으며 개별 국가의 국적도 유지된다. 구성국간의 결합이 강화되면 국가연합 은 일종의 지역통합기구로 발전할 수 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구 소련에 속하였던 국가들은 독립국가연합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을 결성하였다. 독립국가연합은 구성국간 평등 을 기초로 설립되었으며, 초국가적인 국제조직이 아니며, 역내 공동시장의 형성에 노력하며, 구성국은 구 소련의 조약상의 의무에 구속되지 않으며, 안보를 위한 군사협력조정본부가 설치되어 있다. 현재 러시아 등 9개국이 1993년 1월 채택된 CIS 蛋湯 Charter의 회원국으로 있다.
III. 영세중립국
자위의 목적 외에는 무력사용을 하지 않으며, 간접적으로 전쟁에 개입할 우려 가 있는 국제의무도 부담하지 않음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영구히 보장받는 국가를 영세중립국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1815년 비엔나 회의를 통하여 영국·프랑스· 오스트리아·프러시아·스페인·포르투갈· 스웨덴 7개국이 스위스의 영세중립을 승 인할뿐더러, 이들 체약국은 스위스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책임도 약속하는 조약을 거리하기 체결함으로써 영세중립국으로 탄생하였다.
제2차 대전 후 연합국의 분할 점령하에 있던 오스트리아는 1955년 점령국인 미·영·불·소 4개국과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을 체결하여 점령의 해제와 동시에 주 권회복을 약속받고 독일과의 통합금지를 약속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중립에 관 한 법률을 제정하여 각국에 통고하였다. 스위스와 달리 오스트리아의 경우 중립의 보장을 위한 국제체제는 수립되지 않았다.
영세중립국과 관하여는 이들도 UN 회원국으로 가입할 수 있느냐가 문제되었 었다. 스위스는 국제연맹에는 처음부터 가입하여 연맹 본부도 제네바에 유치하였 다. 연맹은 의사결정 구조가 만장일치제였으므로 스위스는 자신이 반대하는 무력분 쟁에 휘말릴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UN에서는 개별 회원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전보장이사회가 강제력 있는 결의를 채택할 수 있으므로 회원국의 지 위가 영세중립국으로서의 의무와 충돌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스위스는 이에 바로 가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UN의 실행을 통하여 개별국가가 헌장 제43조의 특별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무력분쟁에 개입될 염려가 없다고 판명 되자 오스트리아는 주권 회복 직후 UN에 가입하였다. 스위스는 영세중립의 지위가 UN 회원국의 지위와 충돌되지 않는다고 판명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회원국으로 가 입하지 않았다. UN 비 회원국이면서도 영세중립국인 독특한 지위에 따른 국제정치 상의 이점도 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스위스는 1986년 UN 가입 여부에 관 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가입안이 부결되었다가, 후일 다시 국민투표를 실시하 여 2002년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영세중립은 개별국가가 단순히 원한다고 하여 수립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벨 기에(1831). 룩셈부르크(1867) · 콩고자유국(1885) · 라오스(1962) 등 적지 않은 국가가 영세중립을 표방하였으나, 이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즉 영세중립을 원하는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이를 지킬 능력이 있어야 한다. 1995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이 영세중 립을 선언하였고, UN 총회는 이를 승인하고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결의 제 50/80 (1995. 12. 12.)).
구한말에도 대한제국을 영세중립국화하여 독립을 보전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中 당시 조선 주재 독일영사 Budler가 조선의 영세중립화를 권고하였고, 미국 유학에 서 돌아온 유길준도 “중립론”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조선의 영세중립화를 주장하였 다. 그는 조선의 영세중립을 통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조선을 노리는 열강 의 충돌을 방지하여 조선의 독립과 안전을 도모하고자 생각하였다. 한편, 주한 미공 사관에 근무하다가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일하였던 W. Sands도 조선이 외국의 간섭 으로부터 벗어나 발전하려면 중립화를 추진하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집권층은 영세중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외교를 통하여 이를 달성 할 능력도 부족하였다. 호시탐탐 조선의 자기 세력화를 노리던 열강들은 어느 누구도 영세중립화를 지지하지 않았다. 제2차 대전후 한반도가 분단이 되자 중립화 통일론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냉전시대에 이러한 주장은 남북한 어디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였다.
IV. 교황청
교황령(Papal State)은 1870년 이탈리아군의 점령으로 국가로서의 존립을 마치었 다. 이후 교황청 (Holy See)의 국제법적 지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1870년 이후에도 교황청은 카톨릭 교회의 중앙조직으로 수많은 양자 및 다자조약 을 체결하였으며, 각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도 주 이탈리아 대사와 별도로 주 교황청 대사를 파견한다. 이에 교황청의 국제법 주체성은 국제사회의 실행을 통 하여 수락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편 이탈리아는 1929년 교황청과 Lateran 조약을 체결하여 바티칸 市國(the State of Vatican city)을 승인하고, 국제관계에서 교황청의 주권행사를 인정하였다. 현 재 바티칸 시국은 교회 관계자 외에 상주인구가 없으며, 오직 교황청 업무를 지원 하기 위하여만 존재한다. 그런데 바티칸에 관련된 행정관리적 업무의 상당 부분은 이탈리아가 담당한다. 이에 학자들에 따라서는 바티칸이 주권국가임을 부인한다. 그러나 바티칸은 만국우편연합(UPU) 등 여러 조약의 당사자이다. 바티칸과 교황청 을 법적으로 구분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V. 분단국
분단국은 과거 통일된 국가에서 분리되어 현재는 외견상 복수의 주권국가로 성립되어 있으나, 언젠가는 재통일을 지향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분단국이란 특 수한 형태는 주로 제2차 대전 이후의 국제정치질서 속에서 발생하였다. 분단국의 사례로는 과거의 동서독, 남북 베트남, 현재의 남북한 또는 2개의 중국 등이 있다. 분단국이 제기하는 국제법적 문제가 유사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분단국마다 이 에 대한 대처방안은 통일적이지 않아 국제법상 일반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주로 제기되는 쟁점은 다음과 같다.
1. 개별 분단국의 법적 지위
분단국 상호간에는 국가승인을 하지 않으며, 공 식 외교관계도 수립하지 않는다. 분단 상대방을 외국으로 보지 않으며, 양자간의 경 계를 국제법상의 국경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3국의 입장에서 적어도 외교적으로는 분단국이 특별한 법적 현상이 아니다. 국제사회 대부분의 국가들은 분단국 양측을 별개의 독립 주권국가로 승인한다. 분단국 자신도 이러한 제3국의 태도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과거 할슈타인 원칙을 적용하던 시기의 서독이나 중국-대만은 예외). 다만 분단국이 표방하는 재통일의 목표를 국제법상 타국에 대한 병합의사로 보지 않는다. 동서독은 1972년 양독 관계협정을 체결하고, 상주 대표를 교환하고, 이후 양측이 대외적으로 전체 독일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중 국과 대만은 오랫동안 양측 모두 1개의 중국론은 주장하였으나, 근래 대만에서는 별개 국가론도 크게 대두하였다.
2. 구 국가와의 관계
분단국 사례마다 입장이 다르다. 남북한은 양측이 각각 자신만이 과거 한반도에 존속하던 구 국가를 계승하고, 자신만이 전체 한반도를 합 법적으로 대표한다고 주장한다.20) 1986년 대한민국은 과거 대한제국이 체결하였던 구 조약 중 현재도 발효중인 1899년 헤이그 육전조약 등 3개의 조약에 대하여는 현 재도 당사국이라고 발표하였다. 과거 서독은 구 독일인 제3제국은 소멸하지 않았 으며, 자신이 이의 합법적 승계자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동독은 제3제국은 해체되 어 소멸하였다고 보았다.
3. 국적
남북한과 중국은 모두 1개의 국적개념을 인정한다. 즉 일방의 주 민이 타방 지역으로 이주할 때 새로운 국적취득의 절차가 적용되지 않는다. 과거 서독은 구 독일제국의 국적 개념을 유지하여, 동독 주민의 독일 국적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독은 독자의 국적법을 제정하고 서독 주민이 동독으로 이주한 경우 간이 한 국적취득절차를 적용하였다. 분단국들은 분단 상대국민의 자국적을 인정한다 할 지라도 자신의 관할권으로의 복속이 전제되지 않는 한 국제사회에서 그들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적 보호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VI. 파탄 국가
1990년대 이후 소말리아는 형식상 국가로 존속하고 있으나, 내부적 폭력의 발 생으로 인하여 국가의 제도 · 법. 질서가 사실상 붕괴되었고 통상적인 국가로서 기 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게 자신을 대표하는 행동도 하기 어 렵다. 지도상으로는 존재하나, 국제법적으로는 사실상 아무런 기능을 수행하지 못 한다. 이러한 국가를 통상 “파탄 국가(failed states)”라고 부른다. 과거 캄보디아, 시 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도 일시적으로는 유사한 상황에 처하였었다.
파탄 국가의 존재는 국제관계에서의 새로운 현상이다. 파탄국가는 내전으로 인한 무력충돌과 경제적 곤궁으로 자국민을 위태롭게 만든다. 대량의 난민유출이나 내부적 무력갈등의 여파로 주변국가들에게도 불안을 야기시킨다. 이러한 국가는 19 세기 이전 같았으면 손쉽게 인접국가에 병합되었을 것이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국가도 국가로서의 승인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자체적으로 복수의 국가로 분열되 지 않는 한 파탄 국가도 후일 UN 등의 지원을 통하여 국가기능을 회복하고 정상국 가로 복귀하였다. 국제법상 이들 파탄 국가도 법주체성이 유지되고 있으나, 국가를 실질적으로나 법적으로 대표할 기관은 없다. 조약도 체결할 수 없다. 이는 권리능력 은 인정되나, 행위능력은 정지되는 국내법상의 심신상실자와 유사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