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고갱 이국적 환상 리뷰 1

화려한 이국 취미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처음 받는 인상은 화려함과 풍성함, 그리고 다채로운 충실감이다. 캔버스 가득 빨강과 노랑과 녹색, 그 밖에 여러 가지 색채가 화려한 색의 교향악을 울리고 있다. 오른쪽 앞에서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비스듬하게 서 있는 여자, 왼쪽 조금 뒤에서 두 손을 모으고 예배 드리는 듯한 몸짓을 보이는 윗옷을 벗은 두 여자 등 아이를 포함하여 네 사람이 화면의 주요 등장인물이라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분명하다. 인물들은 물론이고 주위의 풍경이 바로 앞에 큼직하게 그려진 바나나에서부터 배경의 수목, 꽃, 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각각 명확한 형태와 강한 색채로 빛나고 있어서 한없이 충실한 느낌을 준다. 고갱은 화면의 모든 부분을 색과 형태로 다 채우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것 같다. 같은 야 외 풍경이라 해도 인상파의 모네나 피사로의 세계와는 너무도 다르다.

 

인상파의 세계에서는 빛과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넓게 펼쳐진 공간이 필요했다. 모네는 <양산을 쓴 여인>을 그릴 때 일부러 아래쪽에서 올려다 본 듯한 구도를 택하여 인물의 등 뒤로 시원한 하늘이 가득 펼쳐지도록 고안했다. 그런데 고갱은 역으로 인물의 배경에서 일부러 하늘을 피하고 화면 위쪽 끝까지 꽃이나 나무로 덮어버렸다. 그 결과 모네와는 반대로 화면 이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듯한 구도로 되어 있다. 인물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대신 다채로운 색과 무늬 속에 끼어들어 있다.

 

이것은 표현 효과로 말하자면 공간보다는 장식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깊이를 가진 광대한 공간을 화면에 붙잡으려 하기보다 오히려 이차원의 화면 그 자체에 틈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화면 맨 앞의 과일들도, 그것이 없으면 그림의 전경이 너무 허전해지기 때문에 그려진 것뿐이다.

 

이러한 구도상의 장식성에 더하여, 이국적인 풍물이 그림에 대한 화려한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한다. 인물은 모두 갈색 피부가 빛나는 남국의 주민들이고 몸에 걸친 의상은 토속적이고 소박한 화려함을 보인다. 그리고 근처에는 남국의 식물이 우거져 요염하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이 그림이 타히티섬에서 그려진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일상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언제나 여름인 밝은 나라를 상정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은 이국적 모티프를 장식적 구도에 담았다고 단언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일단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장식성과 이국적인 분위기지만, 조금  자세히 보면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인물들은 단지 장식적인 모티프로서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뒤쪽에서 손을 모으고 있는 두 여자는 분명 히 오른쪽 앞의 아이를 어깨에 태운 여자에게 절을 하고 있다.  앞의 여자가 화면의 주역이라는 것은 그녀가 유달리 크게 눈에 띄게 그려져 있을 뿐더러 뒤쪽의 두 여자를 의식하지 않는 듯 관객 쪽을 조용히 쳐다보는 데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림의 등장 인물은 사실 네 사람이 아니다. 잘 보면 뒤쪽의 두 여자들보다 더 뒤에 꽃과 잎의 그늘에 가려진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이렇게 인물들을 표현하는 데 확실하게 차이를 둔 것은 바 로 각각의 인물이 제각각 다른 의미와 역할을 맡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아베 마리아’

작품의 의미와 내용에 관해서는 화면 왼쪽 구석에 고갱이 직접 써넣은 그림의 제목 <이아 오라나 마리아HA ORANA MARIA〉가 단서가 된다. 이는 “마리아여, 당신을 경배합니다”라는 뜻의 타히티 말로, 기독교의 기도문 <성모 송> 첫머리에 나오는 ‘아베 마리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고갱은 남태평양 타히티섬의 정경에 기독교적 의미를 넣은 셈 이다. 고갱은 1892년 3월 11일 타히티에서 파리에 있는 친구 다니엘 드 몽 프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란 날개를 단 천사가 타히티 여자 두 명에게 마리아와 예수를 가리 키는 것을 그린 거야. 마리아도 예수도 역시 타히티 사람이지. 그들은 모두 벗은 몸 위에 파레오를 두르고 있어. 파레오란 꽃무늬가 있는 천을 말하는데, 그것을 적당히 허리께에 둘러. 배경은 매우 어두운 산과 꽃이 핀 식물로 채워져 있어. 길은 짙은 보라색이고, 전경은 에메랄드그린이며 왼쪽 앞에 바나나가 있어. 나는 이 작품이 꽤 마음에 들어…”

 

요컨대 고갱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타히티 사람으로 그렸다. 그러고 보면 이 어머니와 아이의 머리 위에는 간략하나마 그들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임을 말해 주는 원광이 달려 있다. 그리고 왼쪽 뒤편, 꽃그늘에 있는 인물은 날개가 있으니 천사임에 틀림없다. 타히티 여자 둘이 손을 모으고 절을 하는 것도, 그들 앞에 서 있는 인물이 성모자라면 당연한 일로 납득이 간다. 즉 이 작품은 언뜻 보면 보통의 이국적인 정경을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버젓한 종교화, 그것도 정확하게 그리스도교의 도상학을 바탕으로 한 종교화다.

 

그렇다면 그림의 배경에 타히티섬의 풍물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의문이 나올 수도 있다. 성서나 성자전을 읽어보더라도 남태평양 일대에 성모 자가 나타났다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성모자가 타히티섬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한층 더 기묘하다면 기묘한 일이다. 그런 데 앞에서 인용한 몽프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갱은 처 음부터 성모자를 타히티 사람으로 그리려고 했다. 이것이 종교화로서는 이례적이라는 것을 고갱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이례적인 종교화를 그렸고 더구나 ‘꽤 마음에 든다’고 친구에 게 전하고 있다. 문명에 물들지 않은 남태평양의 신천지를 찾아서 혼자 타 히티섬으로 건너간 고갱이,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이국적 풍물이나 파레오를 두른 건강해 보이는 타히티 여자들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처자와 친구들과 더불어 낡은 유럽 세계에 두고 왔을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이미지를 억지로 화면에 집어넣으려 하고 있다.

종교적 환상

이는 필시 화가 고갱에게는 그저 눈에 비치는 세계를 캔버스 위에 번역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것은 외부 세계를 눈에 비친 대로, 가능한 한 순수한 형태로 재현하려 했던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의 세계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고갱은 원래 아마추어 화가였다. 금융회사 직원이었던 그가 붓을 손에 잡게 된 배경에는 인상파 화가, 특히 피사로의 강한 영향이 있었다. 따라서 고갱은 처음에는 인상파풍의 작품을 그렸고 또 인상파 동료들의 전람회에도 1879년 제4회 때부터 참가했다.

 

그러나 고갱이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와 같은 완전히 인상파적인 수법으로 그림을 그린 기간은 아주 짧았다. 타히티섬으로 건너가기 훨씬 전부터 고갱은 인상파가 ‘눈에만 신경을 쓰고 머리는 조금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며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 회화란 단지 외부 세계를 충실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상상력이나 지성의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인상파는 감각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기, 그는 정신의 권위를 부활시키려 했다.

 

그렇다면 감각의 세계에서도 남다르게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고갱이, 화려한 타히티의 꽃이나 과일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국적인 무대에서 오랫동안 서구 정신을 길러온 그리스도교의 신비극을 연출하려 했던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눈앞에 있는 현실 세계를 종교적 환상의 배경으로 이용하는 경향은 이 미 1880년대 후반부터 뚜렷이 드러난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국립미술관에 있는 <설교 후의 환영>을 들 수 있다. 당시 고갱 이 살고 있던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을 무대로 사람들이 설교 때 들은 《구약성서》의 야곱과 천사의 싸움을 환영으로 본다는 주제의 작품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민속의상을 입은 여자들이라는 현실적인 요소와 성서 이야기 인 싸움의 정경이라는 비현실적 요소가 수난의 핏빛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붉은색 배경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보는 사람에게 단지 색의 배합이나 구도의 교묘함을 느끼게 하는 것 이상의 불가사의한 신비로운 인상을 심어주는 작품이다. <설교 후의 환영>을 그린 이듬해인 1889년에는 유명한 <황색의 그리스도>에서 수난의 십자가 발치에 역시 브르타뉴의 민속의상을 입은 여자들을 배치하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고갱이 타히티섬으로 처음 건너간 1891년 말에 그린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이러한 종교적 환상 회화와 직접적인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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