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양 국제법 계수
I. 한말의 초기 접촉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세계사의 주류에서 볼 때는 가장 오지(奧地)에 위치하 고 있었다. 19세기 서양 세력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 몰려 오자 조선은 처음으로 유럽 국제법에 접하게 되었다. 조선보다 유럽 국제법을 먼저 접한 국가는 청(淸)이 었다. 쇠락하는 청에게 서양세력은 한 손으로는 대포를, 다른 한 손으로는 국제법을 들이대며 몰아 닥친 괴물이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19세기 중엽까지 중국식 천하관에 입각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였다. 중세의 유럽 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체제였던 것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대등한 주권국가를 전제 로 하는 국제법 질서가 발달될 수 없었다. 과거 중국은 모든 대외관계를 명회전(明 典)이나 청회전(淸會典)과 같은 국내법에 의하여 처리할 뿐이었는데, 서양세력은 청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법원칙을 강요하였다. 중화사상에만 익숙하였던 청은 주 권국가간 교류의 법칙이라는 서양 국제법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청의 관리 린저수(林則徐는 스위스인 Vattel의 국제법서에서 관련부분을 번역 하여 참고하며 영국인의 아편무역을 규제하려 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빌미로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19세기 후반 청에서는 대표적인 서양 국제법서가 번역되어 국제법 개념의 보급에 일조를 하게 된다. 즉 미국인 선교사 W. Martin이 Wheaton의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만국공법」(萬國公法)이란 제목으로 1864년 북경 에서 번역 출간을 하였다. 이어 1877년 Woolsey의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를 「공법편람」(公法便覽)이란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Bluntschli의 국제법서도 1880년 「공법회통」(公法會通)으로 번역하였다. 이 이외에도 청에
서는 몇 가지 서양 국제법서가 더 번역되었다.
청에서 만국공법이 번역되자 일본에서는 이듬해인 1865년 곧바로 복각본이 발간될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고 한다. 명치유신 초기 「만국공법」은 일본 지식인 사회 학생을 유럽으로 파견하였는데, 그 중 에노모토 다케야키(榎本政揚). 니시 아마네 에서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일본 막부는 이미 그보다 앞선 1862년 15명의 유학생을 유럽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네덜란드에서 귀국하여 모두 요직에 발탁되었다. 1875년 강화도에서 운양호사건이 발발할 때까 지 일본에서는 이미 10여 종의 서양 국제법서가 번역 발간되었다. 조선과 비교할 때 서양문물에 대한 일본의 이 같은 발 빠른 초기 대응은 단순히 국제법에 대한 이 해의 폭에 국한되지 않고 후일 양국간 국력의 격차를 급속히 증폭시켰다.
이들 번역서는 동아시아에서 서양 국제법 계수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같은 서적은 조선에도 수입되어 서양 국제법 개념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 만국공법 책이 전달되었다는 기록중의 하나는 일본 관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 賀)가 1877년 예조판서 조영하에게 주었다는 것인데, 당시 일본은 자국 외교사절의 수도 주재를 요구하기 위하여 이 책을 주었다고 한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는 제1 관에서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는 일본이 조선을 청의 세력에서 떼어내 자국의 세력권 하에 넣으려는 의도의 표현 이었다. 조선에서 개화의 바람이 불자 적지 않은 선각자와 유학생들이 주로 명치유 신 이후의 일본으로 가서 국제법을 포함한 법률공부를 하고 돌아 왔다. 이들은 조 선에 국제법을 전파한 제1세대가 된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시 서양 국제법 개념으로 무장한 일본에게 일방적 으로 당한 조선도 1885년 거문도 사건 때는 서양 국제법 이론에 입각한 자기 주장 을 함으로써 국제법을 외교에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27) 특히 조선의 근대적 헌법과 같은 내용을 가졌던 1899년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는 「공법회통」(公法會通) 속의 법률용어를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이 서양 국제법관에 입각한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중국과의 전통적인 사대질서의 부정을 의미하였다. 그 이전까지 조선 외교의 핵심은 사대관계에 입각한 대 중국외교였다. 그러나 서양 식 주권개념에 입각한 국제질서 속에서는 조선이 전적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서양 국제법에 대한 당시 조선 사회의 반응은 찬반이 엇갈렸다. 초기에는 만국 공법을 사악한 책으로 규정하고 이를 수거하여 소각하라는 상소가 있었는가 하면, 이런 책을 4군 8도에서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여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이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1883년 조선 최초로 서양식 학교로 개교한 원산학교 에서 「만국공법」이 교재로 사용되었고, 1886년 설립된 육영공원에서도 「만국공법」 이 강의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에 있어서 국제법은 희망과 좌절을 모두 의미하였 다. 우선 국제법은 타율과 속박의 상징이었다. 조선에 도착한 열강들은 국제법을 내 세우며 자국의 이익 확보에 몰두하였다. 당시 조선이 체결한 모든 수호조약에서는 조선 주재 외국 영사의 영사재판권이 이 인정되었다. 관세 자주권도 억제당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1885-1887), 일본에 의한 을미사변(1895), 1904 년 러일 전쟁시의 국외중립 선언, 강박에 의한 을사조약의 체결(1905) 등 조선의 주 권을 침해당한 중요 사건시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법을 통한 권리주장을 하 였다.30) 1900년대로 들어서면 의병장들도 국제법에 의한 일본의 단죄를 주장하였 으며, 안중근 선생 또한 거사 이후 자신은 국제법상의 포로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주권을 상실해 가는 현실 속에서 국제법의 힘을 빌어 독립을 지 켜보려는 애처로운 노력이었다. 그들은 주권, 중립, 조약 등 국제법적 개념을 주장 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미약한 힘을 국제법이 보완해 주기를 희망하던 선각자들은 국제법 지식 의 보급을 위하여 애국계몽잡지에 수 많은 국제법 논설을 게재하였다. 1895년 법관 양성소가 설립되자 서양식 법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가 이루어졌고, 후일 국제법 도 독립된 과목으로 추가되었다. 후일 건국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10년 프린스톤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란 국제법 논문을 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정식의 서양식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다. 국내에서는 석진형, 이용무, 주정균, 유문환 등이 교육용 국제법서를 펴내고 법 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를 위한 일제의 침략을 막지는 못하였다. 관양성소나 보성전문 등에서 국제법을 강의하며 이의 보급에 진력하였다.
II. 광복후 국제법의 재보급
일제시대 조선인 중에는 법률학, 특히 공법 분야를 공부한 사람이 많지 않았 다.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제법 지식에 대한 수요는 갑자기 늘어났으나 전문가는 희귀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 박관숙, 이한기, 고려대학교에서 박재섭 등이 국제법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그중 박관숙은 후일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로 옮겨 강의하였다. 이들이 광복후 이른바 제1세대 국제법 학자들의 중심을 이루었다.
1952년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하자 일본은 이를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력히 반발 하였고, 이에 대한 조직적인 학문적 대처를 위하여 1953년 대한국제법학회가 창설되 었다. 당시 창립 총회의 장소가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던 해군 함정이었다는 사실은 6.25 와중의 열악한 사회실정과 함께 당시 한국사회가 왜 국제법을 필요로 하였는가 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대한국제법학회는 1956년 국제법학회논총을 창간하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바 이는 국내 법학관련 학술단체의 최고령 학술지이다. 이후 한국사회의 발전과 국제화에 따라 국제법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급증하 였으며, 국내 학계의 학문적 수준도 올라갔다. 이제는 국내 국제법 학계도 세부 분 야별로 전문화의 길을 가고 있으며, 국제회의에서의 조약 체결시에도 활발한 기여 •를 하고 있다. 국제해양법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 등과 같은 국제재판소 판사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