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국제법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19세기부터 20세기의 기간 동안 한국은 국 제질서의 형성에 적극적 참여자의 위치에 서지 못하였다. 외세에 의한 강요된 개방 과 피식민의 경험, 광복후 국토분단에 따른 국제정치적 제약으로 인하여 한국은 국 제규범 형성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하였다. 제2차 대전후 한 반도는 불행히도 국제정치의 최변방으로 냉전의 충돌지점이 되어 6.25라는 미증유 의 비극을 경험하였다. 이후에도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남북한 대결 외 교에 발목을 잡히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통일국가의 설립이라는 19세기적 과제조차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국가간 합의에 의하여 성립되는 국제법도 한국으로서는 타자에 의해 강요된 질서로만 인식되었다. 국제법에 대한 피해의식만이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이해가 간다. 현실의 국제질서 속에서 잉태된 역사적 피해의식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과잉을 결과하였고, 국제협력이나 국제교류는 “가진 자”의 배부른 유희 정도로 여겨졌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오늘의 한국사회가 국제법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와 유사한 지정학적 환경에 처하고도 국가 존립의 수호와 국익 확보를 위하여 활발한 대외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제국들의 외교전략의 특징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이들 중위권 강소국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국내시장 규모로 인하여 높은 수준 의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외시장에 적지 않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자연 이들 국가는 대외개방경제를 지향하게 되며, 개방정책을 비단 경제분야로만 한정시키기는 어렵다. 사회 각 분야의 개방도 병행되어야 한다. 개방은 관용을 필요 로 하며, 관용은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게 된다. 역사에서 쇄국을 통하여 국가의 번 영을 이룩한 사례가 과연 있었는가? 쇄국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일시적으로 국가 를 보호해 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후퇴시키며 주권의 보지마저 위태롭 게 한 예가 더 많았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이들 국가로서는 안정적 국제질서의 확보에 높은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으며, 대외관계의 처리에 있어서 어떤 국가도 부인하기 어려운 보편적 가치와 국제법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주권평등을 기본 원칙의 하나로. 는 국제법은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경우 가장 효과적인 교섭 수단이 되기 때문이 다. 국가가 국제법을 대외정책에만 한정하여 활용할 수는 없다. 이들 국가들은 국내 적으로 국제기준을 충실히 이행하며, 높은 수준의 인권보호를 실천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이들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평화애호와 인권존중에 있어서 특별한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미지 자체가 대외교섭과 국가안보에 도움이 된다.
결국 이들 중위권 강소국들의 대외전략의 특징은 적극적 대외개방, 대립되는 이념의 관용적 수용,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중시, 보편 규범에 입각한 대외관계의 처리,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적극적 기여자세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 한 이들 국가의 공통점의 하나는 위와 같은 원칙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제법에 관한 탄탄한 국내 지식기반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나 오스트리아의 헌법 이 경우에 따라서는 헌법보다 조약에 우월한 효력을 인정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
다.
반면 한국에서는 대외관계의 처리에 있어서 국제법이라는 보편 규범에 의한 접근이 국내적 호소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오히려 업무추진에 장애로 등장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지난날 한일 신 어업협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변화된 국제해양법 질서 속에서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를 모색하기 보다는 합리적 대안도 못 갖춘 감정적 반대론이 사회적 호소력을 쉽게 확보하지 않 았었나 싶다. 국제법에 대한 사회적 인식 기반이 좀더 탄탄하였다면 불필요한 사회 적 혼선과 내적 갈등을 최소화시키며, 사태에 보다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은 세계 4강에 해당하는 일본, 러시아, 중국 등과 국경을 대하며 둘러싸여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기는 하나, 현재의 인구 규모, 경제 규모, 국토의 •면적 등을 종합하여 판단할 때 결코 약소국은 아닌 이른바 중상위권 이상의 국가이 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가까운 장래에 한국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이들 인접국들을 압도하기는 어렵다. 세계 4강 중 3개국과 국경을 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의 장기적 생존과 발전에 지정학적 위치가 만족스럽지 않을지 모르나,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 인접국가들과의 틈바귀 속에서 발전전략을 짜야 한다. 당분간 한국이 인접국가와의 관계를 힘의 논리로 풀어가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 다. 그렇다면 한국이 이들을 상대로 외교를 하고, 국익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모두 가 부인할 수 없는 보편적 규범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의 공통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국제법이 바로 그러한 보편 규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한국이 남달리 국제법의 중요성에 주목하여야 할 이유가 있다.
물론 국제법이 강대국의 선도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나, 한국 같은 규모의 국가가 힘으로 대항하기 힘든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교섭에서는 국제법 이상의 유용한 틀이 별로 없을 것이다. 국제법은 비록 가식적일지라도 주권국가 평등원칙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부존자원은 부족하나, 인구밀도는 높은 국가의 경우 대외교 류의 활성화는 국가의 장래를 결정지을 요소가 될 것이다. 한국은 이미 무역규모가 세계 10위권 안에 해당하는 등 대외 교류를 배제하고는 국가의 정상적 생존을 생각 할 수도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화의 추세는 우리로 하여금 대외교류를 더욱 외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국제법의 연구와 활 용은 곧 대한민국의 생존 및 발전전략과 직결되는 것이다. 전시에는 군인이 무기를 들고 국가의 존립을 수호한다면, 평시에는 국제법으로 국가의 주권과 이익을 보호 30 하여야 한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이를 방지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탱크 몇 대를 살만한 돈이면, 국제법의 연구진흥에는 획기적인 투자가 될 수 있으므로, 국제 법의 연구진흥은 가장 경제적인 국가수호의 길이 된다. 국제관계에서 예측 가능성 을 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인 국제법 연구를 한국은 결코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이에 동북아 국가인 한국이 현재 이상의 경제적 번영과 함께 국제정치질서에 서 자신의 역할을 찾기 위하여 향후 추구하여야 할 대외전략을 국제법의 시각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여 본다. 첫째, 국제법과 같은 국제규범을 존중하며, 이의 발전 에 기여한다. 둘째, 인권존중이나 환경보호와 같은 인류의 공통가치를 실현하려는 국제법적 노력을 지지하며 이에 기여한다. 셋째, 국제문제의 다자적 해결노력을 중 시하며, 이를 위하여 국제기구의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넷째,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며, 이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기여한다. 다섯째, 이상과 같은 국제법적 노력을 국내적으로도 충실히 이행하며, 그 과정에서 과도한 자민족 중심주의의 분출을 경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