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게르니카 리뷰 1

I. Picasso Guernica : 비극의 시작

비극은 1937년 4월 26일에 시작되었다. 스페인 프랑코 장군을 지지하는 독일 나치 공군 폭격기 편대가 갑자기 스페인 게르니카 시를 습격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으며 다음날인 27일, 영국의 더 타임스는 공습의 규모를 아래와 같이 전하듯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프랑코 장군을 지지하는 국가주의자들과 공화파간의 스페인 내란이 계속 지속중이긴했지만 전란에서 멀리 떨어진 게르니카 시는 별로 내란에 관여되어 있지 않고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유서 깊은 도시에 아무 예고없이 무차별 폭격과 기관총 난사를 했으니 전세계로부터 비난이 쏟아진 것은 corollary였다. 당시 30년 이상 조국을 떠나 파리에 머물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강했던 피카소가 분개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비극 이전부터 공화파를 지지하고 프랑코파를 반대하는 태도를 확실히 해왔다. 일부 그림을 팔아서 공화파를 위해 여러차례 기부했으며 1937년 1월에는 공화파의 군사력이 약해지자 자신의 방법으로 프랑코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것은 바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이라는 두 장의 동판화 앨범이었다.

이 동판화는 각각 아홉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끔찍한 괴물이 민중을 괴롭히는 모습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누가봐도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을 저격한 것이다. 원래 각각 따로 총 18점의 판화로 제작할 예정이었으나 아홉그림을 한 화면에 모아놓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그대로 두었다고 전해진다. 18개의 그림의 테마는 아래와 같다.

위는 피카소가 <프랑코의 꿈과 거짓> 판화를 내놓으면서 함께 직접 쓴 산문시이다. 그가 쓴 시가 문학적으로 얼만큼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피카소의 회화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위 시를 읽고나서 <프랑코의 꿈과 거짓> 판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위 산문시에서 말하는 이미지들이 다수 발견된다. 목에 들이댄 창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 매달린 아이들, 죽은 아이를 안고 불타는 집에서 기어 나오듯 도망치는 어머니, 창에 찔린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죽은 어머니와 같은 처참한 이미지는 <게르니카>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이를 보면 마치 피카소가 예술가의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미래에 닥칠 비극을 미리 본 것 같다.

II. Picasso Guernica 동기 그리고 모티프

안그래도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던 피카소가 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듣고 격한 분노와 함께 창작 의욕을 불태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침 그해 가을 파리에서 열릴 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 공화국관에 벽화를 제작해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 <프랑코의 꿈과 거짓>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가 들끓고 있던 피카소에게 게르니카 공습은 창작력 폭발에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게르니카 폭격 며칠후에 이미 <게르니카> 최초 스케치가 완성되었다. 대략적이긴 하지만 창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빈사의 말, 누워 있는 병사, 그리고 건물의 창밖의 비극을 목격하는 여자 등이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게르니카>의 주된 구성요소가 되는 모티프들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피카소 <게르니카>는 다행히도 완성작에 앞선 스케치, 소묘 등 60여 점의 밑그림이 정확한 날짜와 함께 남아 있다. 따라서 (특별히 Thanks to 그 무렵 피카소의 연인 Dora Maar) 이 대작을 그리는 과정의 기록에 남아 있어서 반년에 걸친 <게르니카> 창작 과정 하루하루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게르니카> 밑그림들을 날짜순으로 보면, 초기에는 구도를 잡는 매우 간단한 스케치, 그 다음부터는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빈사의 말, 그 말과는 대조적으로 서 있는 황소, 아이를 안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어머니, 죽은 병사, 울고 있는 여자들 등과 같은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등장한다. 주목할 점은  게르니카 도시 인구 1만명의 대부분이 학살된 이 비참한 사건을 그리면서도 피카소는 도시를 암시하는 야외 풍경이나 실제로 폭격을 당한 거리와 사람들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림의 반쯤은 상징적인 실내로 화면을 설정했는데, 등장인물은 겨우 여섯명, 거기에 말과 소와 새를 더해도 열 개도 채 안 되는 주요 모티프의 조합이 화면을 구성한다. 물론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하는 어머니, 불타는 집에서 양 손을 치켜들고 뛰어내리는 여자 등과 같이 폭격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모티프들도 그려졌다. 하지만 말과 소, 램프를 손에 든 여자(실제 폭격은 낮에 있었다)등이 커다랗게 그려진 것을 보아도, 이들이 현실 묘사가 아니라 극히 상징적인 장면을 그린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III. Picasso Guernica 모티프의 다양한 해석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게르니카>속 각각의 모티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양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중앙에서 울부짖는 말은 프랑코의 군사력에 고통받는 에스파냐의 민중이라든지, 그림 오른쪽에서 등불을 들고 창문밖으로 얼굴을 내민 여자는 에스파냐 내란을 지켜보는 타 유럽 국가들 나타낸다는 등의 해석이 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의견이 갈리는 쪽은 화면 왼쪽 끝 유일하게 아무런 움직임도 표정도 나타내지 않고 조용히 서 있는 황소에 대한 해석들이다.

스페인 비평가 후안 라레아와 칸바일러는 황소는 스페인에서 옛날부터 토템으로 숭배되던 동물이었다는 점에서 불요불굴의 에스파냐 민중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스페인 국적의 비평가 빈센테 마레로에 의하면 말이야말로 에스파냐의 민중이고, 황소는 그들을 압박하는 파시즘의 폭력을 상징한다고했다. 이렇게 피카소와 같은 국적의 비평가들끼리도 황소의 의미와 평가가 정반대로 갈렸다. 빌헬름 뵈크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황소와 말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황소는 에스파냐 국가의 계속을 나타내고 말은 그 역사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 둘이 합쳐 에스파냐 국가 자체를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Carla Gottlieb에 따르면 소는 프랑스를 상징한다. 그 소가 비극속의 말과 사람들을 외면하는 이유도 에스파냐 내란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불간섭 정책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드립은 화면 오른쪽 밑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는 가슴에 ‘낫과 망치’ 장식을 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소련을 나타내며, 소가 상징하는 프랑스와는 달리 소련은 ‘동쪽에서’ 에스파냐 공화국을 구하러 달려왔다고 설명한다. 너무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분석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런데, 1944년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 한 미군 병사가 피카소에게 <게르니카>에 그려진 소는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피카소는 “이 소가 꼭 파시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폭력과 암흑의 상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른하임은 이 일화를 근거로, 소는 구체적으로 프랑코나 파시스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추상적인 악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위처럼 단순히 「게르니카」를 단순히 시사적인 의미를 갖는 작품으로 보지 않고 William Darr은 <게르니카> 모티프의 구성들을 ‘죽음’과 ‘에로스’의 싸움이라고 해석한다. <게르니카> 중앙을 경계로해서 화면을 좌우 둘로 나눌 경우 왼쪽에 보이는 황소와 어머니, 말과 병사의 관계는 각각 ‘에로스’의 세계를 암시하며, 황소의 뿔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남성을 나타내고 그에 대응하는 오른쪽의 창문은 여성을 암시한다고 Darr은 보았다. 그런 ‘에로스’의 원리가 항상 ‘투쟁’이나 ‘죽음’의 원리와 결부된다는 점으로부터 바로 피카소 특유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게르니카」는 어떻게 보더라도 명실상부한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이렇게 <게르니카>를 어떤 구도로 보느냐에 따라 모티프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점에서 <게르니카> 모티브들이 구성되고 배열된 방식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 게르니카의 비극에 앞서 그리고 같은 해 <프랑코의 꿈과 거짓> 동판화 제작에 앞서 이미 피카소는 훨씬 전부터, 적어도 스페인 내란 시작 전부터 죽임을 당한 말과 황소, 폭력에 지배되는 여자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35년에 제작된 동판화 「미노타우로마키」이다.

동판화 「미노타우로마키」에는 황소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폭력을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비롯해서 램프를 든 소녀, 미노타우로스의 폭력성 앞에 겁을 먹은 말과 여자, 창 너머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여자들, 사다리를 타는 인물 등, 훗날 「게르니카」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모여있다. 단, 「게르니카」에서는 창 너머로 바라보는 여자와 램프를 든 소녀가 한 인물이 되고, 소녀의 손에 들려 있던 꽃다발은 죽은 병사의 손으로 옮겨졌다. 또한 사다리는 「게르니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죽은 아이를 안고 불타는 집에서 뛰쳐나오는 어머니의 모티프로서 밑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이를 보면 피카소도 몇 개의 주요 모티프를 평생에 걸쳐 집념처럼 반복해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IV. Picasso Guernica  모티브 통합 구성

<게르니카> 작품 중앙 기준으로 약간 좌측 상단에 놓인 램프를 정점으로 바닥의 양끝으로 넓어지는 피라미드형이 작품의 기본 구도임을 얼핏 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단순한 구도임에도 작품 자체에서 긴장감과 박력이 느껴지는 이유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물들의 조합과 아래에서 설명할 피라미드형 외에 또 다른 구성 원리때문이다. 실제로 <게르니카>속 인물들은 화면을 가득 메우듯이 배치되면서 그 결과 피라미드 구도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복잡하다는 인상을 준다.

  1. Auguste Preault <Slaughter> (Tuerie)

서로 충돌하듯 긴장감 넘치는 인물 배치 구성에 대한 힌트를 피카소에게 준 작품은 역시 죄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학살을 테마로 한 로마파의 거장 오귀스트 프레오의 부조「학살」이었다. 프레오의 「학살」 역시 화면 가득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목을 길게 잡아 땐 여자의 옆얼굴과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어머니 등 비슷한 모티프도 여러개 있다.

<학살>에서는 투구를 쓴 무시무시해 보이는 병사의 얼굴이 있는데, 이 얼굴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이 전체 구도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 병사 얼굴의 위치가 바로 <게르니카>에서 램프와 소 머리가 있는 해당 부분으로 피라미드 구조의 시작점이다. 즉 테마뿐 아니라 기본적인 구도 방식마저도 <게르니카>는 프레오의 「학살」을 답습하고 있다. 「게르니카」의 화면이 색채를 거의 쓰지 않고 흑백과 회색만으로 구성하는 것도 어쩌면 프레오의 부조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1. Triptych 형식

위 두가지 구조말고도 <게르니카> 화면 구성 원리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중세 말기에 특히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 다수 제작되었던 세 폭 제단화 Triptych 형식이다. 실제로 아른하임 교수가 지적했듯이, 「게르니카」의 화면은 보통의 그림에 비해 특이할 정도로 가로로 길다. 게다가 여러장의 <게르니카> 스케치에서도 이렇게 가로로 긴 화면의 그림은 없으며 파리 만국박람회 에스파냐 공화국관 벽장식용 작품인데도 벽의 크기와 전혀 맞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게르니카> 가로 세로 비율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형식이다.

<게르니카> 화면의 폭은 높이의 두배보다 조금 더 길다. 즉, 가로와 세로가 거의 2:1 비율인 셈이다. 이것은 정사각형의 중앙 화면에 크기가 반쯤 되는 날개를 좌우로 붙인 고딕 시대의 세 폭 제단화가 활짝 펼쳐져 있을 때의 비율과 같다. 이런 형식의 제단화는 평소에는 좌우 날개를 중앙 화면 위로 접어두기 때문에, 양쪽 날개를 합치면 중앙 패널과 같은 크기가 되도록 구성된다.

「게르니카」의 화면에도 그런 구성이 적용된다. 실제로 「게르니카」의 화면을 세로로 4 등분해보면, 오른쪽 끝은 불타는 집에서 떨어지는 여자, 왼쪽 끝은 소와 아이를 안고 우는 어머니로 모티프로 채워져 있다. 가운데 두 부분이 합쳐진 정사각형안에는 말과 램프를 든 여자 모티프가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좌우 양날개는 게다가 이 좌우 양 날개는 구성상으로도 서로 호응하는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위쪽은 각각 소의 꼬리와 뿔,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이며, 아래쪽은 병사의 손과 머리, 그리고 여자의 다리와 무릎이 그려져 있다. 이 제단화식 구성이 상당히 의식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매우 복잡한 인물 배치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무질서하지 않은 것은 이런 명확한 제단화식 구성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가로의 길이가 세로의 갑절이 되는 이 화면은 실제로 세 쪽으로 나뉘는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화면 중앙에서 좌우로 정사각형 둘로 나눌 수도 있다. 피카소가 이 점 역시 의식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바로 중앙에 빛과 어둠을 가르는 경계선이 위치한다는 점에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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