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 리뷰 2
원추와 원통과 구체
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 모델을 노려보면서 세잔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앞에서 인용한 가스케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우선 모델을 ‘보고’ 있었다. 자기 눈을 통해 눈앞에 있는 대상의 모든 것을 읽어내려 했다. 그러나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에서 세잔이 보고 있었던 것은 모네가 보았던 대로 모든 것이 매력적인 빛의 물결로 덮인 세계도 아니었고 르누아르가 보았던 잘 익은 과일처럼 따뜻하고 싱싱한 피부의 매력도 아니었다. 그가 찾았던 것은 대상의 형태를 이루는 본질적인 구조였다. 모든 것을 빛의 물결로 환원해 버리는 인상파의 세계 속에서 세잔은 대상을 주위 세계로부터 구별해 주는 기본적인 형태를 찾았다. 그리고 그러한 확고한 형태를 찾는다는 것은 이미 시신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나중에 조르주 브라크가 “눈은 형태를 왜곡하고 정신은 형태를 만든다” 라는 간결한 말로 표현했듯이 자연 속에서 하나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정신의 작용이다. 세잔이 친구인 모네에 대해 “그는 하나의 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훌륭한 눈인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이 말은 모네의 섬세한 감각에 대한 찬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은근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형태를 파악하는 것은 단지 눈만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기하학의 세계와 상통하는 지적인 정신의 작용이다. 세잔이 젊은 친구인 베르나르에게 “자연을 원추와 원통과 구체로 파악”하라고 가르쳤던 것도 실은 그런 의미였다.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을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과 비교해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얼굴의 눈코는 물론이고 신체의 윤곽선마저 또렷하지 않은 모네의 젊은 여자와 달리 오르탕스의 모습은 분명하게 자기의 형태를 주장하고 있다. 그녀의 갸름한 얼굴은 머리, 이마, 턱선 등 모두가 컴퍼스로 그린 것처럼 명확한 반원형이고, 전체의 질서를 깨는 듯한 세부, 예를 들면 두 귀 등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얼굴의 기 본적인 리듬인 곡선에 호응하여 두 어깨 역시 탄탄한 아치를 형성하고 몸 통은 허리에서부터 아래로 퍼지는 원추 위에 단단히 올려져 있다. 목과 두 팔은 그야말로 원통이며 여기에서도 손끝과 같은 세부는 무시되고 있다. 이렇게 파악된 대상은 역시 마찬가지로 엄격한 기하학적 질서를 가진 구도 속에 배치된다. 약간 고개를 기울인 세잔 부인의 두 눈 및 입술의 선은 화면을 크게 가로지르는 뒤쪽 벽의 비스듬한 선과 평행하며, 그것들과 정확히 직각으로 교차하도록 배경의 나무와 모델의 오른손을 잇는 또 하나의 기본선이 설정되어 있다. 젊은 화가들에게 언제나 자연을 바라볼 것을 가르쳤던 세잔은 “자연을 따라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결코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실현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경우 그가 말하는 감각이란 바로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신의 인식 작용이었다.
드라마 없는 드라마
그렇다면 세잔의 그림들은 컴퍼스와 자로 그린 기하학적 도형과 다름없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에서 그것과는 정반대의 인상을 받는다. 거기에는 따뜻한 태양 빛 속에서 숨 쉬는 충실한 형태가 있고 모델을 둘러싼 풍부한 공간이 있으며 세잔의 초상화로서는 거의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미미하지만 서정적 향기마저 느껴진다. 이것이야말로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까지 포함하여 세잔이 모델에게서 느낀 감각이었다. 그는 이것을 부분적으로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되는 화면에 훌륭하게 실현한 것이다. 기하학적 구성에 풍부한 현실 감각을 실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야 말로 세잔이라는 천재에게만 허락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적을 설명하는 일이 헛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의 제작 과정을 분석해 보면, 한마디로 말해 색채와 데생의 통일에 의한 새로운 회화 공간의 확립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회화 공간의 확립이란 캔버스의 평면성과 표현되는 대상의 입체성, 즉 이차원의 세계와 삼차원의 세계라는 서로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성립시키려고 하는 곡예다. 원래 평면성과 입체성의 모순은 애초부터 회화 예술에 내재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서구 회화는 원근법이나 명암법에 의해 삼차원 세계의 환영을 화면 위에 추구해 왔는데, 이때 당연히 평면성의 강조는 부정되어 왔다. 인상파의 등장은 세계를 모두 빛의 모습 속에서 바라봄으로써 깊이를 잃게 하고 점차로 화면을 평면에 가깝게 만들어갔다. 모네가 만년에 그 린 <수련> 그림에서 연못의 기슭이나 하늘이 사라지고 수면만 그려지게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인상파의 세례를 받은 세잔은 당시의 전통적 회화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듯이 원근법이나 명암법에 의한 입체 표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색채의 풍부함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감각을 배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화면의 이차원성에 완전히 복종해 버릴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의 ‘원추와 원통과 구체’는 삼각형과 직사각형과 원으로 환원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 큐비즘(입체파) 그룹의 사람들이 실제로 걸어간 길이다. 세잔 자신은 공간의 깊이와 대상의 두께와 화면의 평면성을 모두 동시에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세잔이 사용한 방법은 색채에 의한 조형이다. 그의 작업 방식은 전통적인 회화처럼 우선 데생으로 형태를 정리하고 거기에 색을 칠해 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상파의 색채 분할처럼 형태를 무시하고 색의 터치를 병렬시키는 방법도 아니었다. 색채 그 자체에 의해 형태를 만들어간다는 그만의 독특한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의 얼굴에는 전통적인 음영에 의한 의해 표현된다. 즉 그림자에 해당하는 부분은 푸른 기가 있는 색으로, 부풀어 있는 부분은 빨강이나 오렌지색을 썼다. 우리의 감각에서 차가운 색은 입체화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의 요철은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의 대비에 뒤로 물러나 보이고 따뜻한 색은 앞으로 나와 보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입체감이 표현되는 셈이다.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에서는 색채에 의한 입체화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기에 얼굴은 평면적인 편이다. 이에 반해, 예를 들어 보스턴미술관에 있는 <붉은 팔걸이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에서는 입체화가 강조되어 얼굴의 입체감이 한층 뚜렷해진 대신 마치 파란색으로 화장을 한 듯 얼룩덜룩하게 보인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든 색채의 종류나 농담, 배치는 아주 조금만 잘못되어도 얼굴 전체의 구조를 망치게 된다. 세잔이 모델을 앞에 두고 그토록 오래 고민한 것은 바로 그 정확한 표현을 잡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에서 오르탕스의 보랏빛이 감도는 파란 옷도 언뜻 보기에는 되는 대로 찍은 터치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부풀어 있는 부분은 붉은 기가 비낀 보라색이며 들어가 있는 부분에는 푸른 터치가 더해져 있어서 역시 색채에 의한 조형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완성된 결과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기에 그 미묘한 계산을 깨닫지 못하지만, 세잔이 애쓴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의상의 일부나 손등이 아직 미완성 상태이지만, 거기에서 세잔의 작업 과정이 더욱 잘 드러난다. 하나의 터치를 화면에 더하는 것은 전체 색의 균형을 바꾸는 것이기에 당연히 화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세잔은 부분적으로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체의 효과를 생각하면서 전체를 동시에 진행시켜갔다. 따라서 여기서 보듯이 미완성 부분이 화면 여기저 에 흩어져 있지만 화면 전체의 엄격한 질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색채와 데생은 결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색을 칠해 감에 따라 데생은 견고해지고 데생이 충실하면 더불어 색채도 풍부해진다”라고 한 그의 유명한 말은 바로 색채에 의한 조형의 본질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여 세잔 부인의 몸은 뚜렷한 입체감을 갖기에 이른다. 색채의 배합과, 거기에 더하여 세잔 부인 등 뒤에 있는 벽, 그 너머의 나무라는 몇 개의 면이 서로 겹침으로써 공간의 깊이도 확보된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분명히 현실의 공간과 살아 있는 몸을 가진 인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간 형성의 중요한 담당자인 색채가 화면 전체에서 똑같이 풍요롭게 빛남으로써 직관적으로 화면의 평면성이 부각된다. 우리는 세잔 부인의 오른쪽에 있는 빨간 꽃이나 등 뒤에 있는 나무가 세잔 부인보다 뒤쪽에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꽃의 선명한 빨간색이나 나무의 녹색이 세잔 부인이 입은 보랏빛이 감도는 파란 옷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빛을 지니고 있기에, 꽃이나 나무가 놓인 화면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분명히 깊이 있는 공간에 배치되어 있는데도 동시에 하나의 같은 평면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한순간 어지럼증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된 <붉은 팔걸이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의 경우에도, 옷의 파랑과 의자의 빨강과 뒤쪽 벽의 노랑이 서로 겹침으로써 우리에게 마찬가지 감각을 전해 준다. 공간 속에서 각각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치마의 세로줄 무늬가 평 면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어, ‘납작한 공간’ 또는 ‘깊이를 가진 평면’이라 는 이상한 체험은 더욱더 강렬하다.
색채에 이토록 많은 역할을 떠맡겼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하다. 여기에서는 색깔의 아주 작은 흐트러짐도 당장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세잔이 그린 세계는 풍경이나 정물은 물론 인물조차도 언뜻 보기에 아주 평범한 일상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무서울 정도의 색채와 형태의 드라마가 숨어 있다. 그가 회화의 방향을 크게 바꿔놓은 것 도 실은 이 드라마 없는 드라마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프랑스의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에 엑상프로방스에서 모자 가게를 하다가 얼마 후 은행을 설립하여 크게 성공했다. 세잔은 처음에는 집에서 시키는 대로 법 를 공부를 했지만 화가가 되고 싶어서 파리로 갔다. 하지만 파리 국립고등 미술학교 시험에 몇 번이나 떨어지고 살롱에 작품을 보내도 언제나 낙선이 었다.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하는 이 비극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세잔은 처음에는 낭만파 회화, 특히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인상파의 체험이 었다. 주로 피사로와의 교우를 통해 인상파 그룹에 참가하여 새로운 색채 세계를 발견했고, 그 이후로 밝고 풍부한 색채와 엄격한 화면의 구성적 질 서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886년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오로지 엑상프로방스에 틀어박혀 혼자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 고독한 탐구에서 마침내 20세기의 새로운 회화가 태어나게 된다. 사실 만년의 세잔은 화상인 볼라르나 젊은 친구 베르나르 등 극소수의 사람들만 사귀었고 작품도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 고 1년 후에 파리에서 열린 회고전은 직접적으로는 큐비즘 운동의 출발점 이 되었고 나아가 현대 회화 전체에서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