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 리뷰 1

초상화의 전환

세잔의 초상화를 대할 때는 초상화에 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초상화란 오랫동안 (적어도 세잔의 시대까지는) 조형 작품으로서의 감각적인 즐거움과 함께 그려지는 인물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초상화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이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실제 작품에서는 화가의 개성이나 사회적 관습, 그리고 주문자의 의향 등에 따라 강조되는 부분이 달라진다. 어떤 화가는 무엇보다도 모델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하는데 정열을 쏟을 것이고 또 어떤 화가는 오히려 모델의 성격이나 심리를 화면을 통해 전달하려 할 것이다. 왕후 귀족이나 권력자의 초상을 그릴 때는 사회적 지위라든가 권위 등을 강조해야 하 며 때로는 거기에 이야기를 담아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가는 전체 구도를 잡는 방식은 물론이고 모델이 되는 인물의 옷차림, 자세, 부속품, 무대, 배경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초상화는 모델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이것이 세잔 부인의 초상화임은 알고 있다. 그녀는 보랏 빛이 감도는 파란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그러나 자세는 매우 평범하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녀의 사람됨이나 분위기를 보여줄 만한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과연 세잔 부인이 이렇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녀를 그린 다른 작품에서는 같은 인물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세잔의 수많은 초상화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인물들은 아무 행동도 보이지 않고 특별한 자세도 취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모델에게 차갑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편인 앵그르조차 <베르탱의 초상>을 그릴 때 어떤 자세가 이 정력적인 실업가에게 어울릴지 여러가지로 고심을 하다가 베르탱이 혼자 방에 있는 모습을 문틈으로 몰래 관찰하고는 두 손을 무릎에 올린 결정적 포즈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잔에게서는 그러한 배려를 볼 수 없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기에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사정이 있기도 했지만 모델은 대개 깍지 낀 손을 앞에 두고 앉거나 혹은 손으로 턱을 괴는 등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모델이 된 인물은 무언가 행동을 하고 있지도 않고 행위를 암시하고 있지도 않다. 세잔은 자신의 모습을 서른 번 정도 그렸는데, 그중에서 팔레트를 들고 캔버스를 향한 모습 즉 그가 화가임을 알려 주는 작품은 단 한 점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배경이나 부속품도 아무런 이야기나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세잔은 무엇보다도 모델의 조형적 특질에 끌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잔의 작품이 때때로 오해되듯이 오로지 색과 형의 구성 으로만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친구인 조아킴 가스케에게 세잔이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모델을 읽어내고 그것을 실현하는 작업에는 시간이 매우 많이 소요된다.” 즉 그는 모델이 지닌 모든 본질을 읽어낸 다음 그것을 화면에 실현하는 두 단계의 조작을 거쳐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야기가 담긴 포즈나 심리적인 표현이나 사회적 신분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세잔은 모델로부터 도대체 무엇을 읽어내려 했을까.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기 전에, 여기에 그려진 세잔 부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선 그것을 살펴보자.

이상적인 모델

세잔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게 된 이 오르탕스 피케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다. 세잔의 생애로 들어오기 전의 그녀에 관해서라면 프랑 스 동부 쥐라 지방의 작은 마을 출신이고 아버지는 평범한 은행원이었다는 것 정도밖에 알 수 없다.

 

오르탕스가 세잔과 알게 된 것은 1869년이었을 것이다. 1850년에 태어난 그녀는 당시 겨우 열아홉 살이었고 세잔은 이미 서른 살이었다. 그 무렵 오르탕스는 집안을 돕기 위해 모델 일을 했고, 그러다가 세잔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랬는지 확증은 없다. 오히려 이것은 비사교적이고 특히 이성에 대해 남달리 겁쟁이였던 세잔이 젊은 여성과 사귀었다면 다른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생겨난 이야기로 여겨진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었고 함께 지냈다. 3년 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고 세잔과 같은 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잔은 이 아들을 호적에 넣었으나 아이의 어머니는 훨씬 나중까지도 정식으로 입적하지 않았다. 오르탕스가 정식으로 세잔 부인이 된 것은 1886년 4월, 즉 두 사람이 만난 지 17년이 지나서였다. 그때 아들은 이미 열네 살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 그렇게 늦어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세잔이 오르탕스를 자신의 가족, 특히 아버지에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까지 세잔은 부모가 있는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와 파리 사이를 오가며 생활했는데, 부모의 집으로 갈 때는 오르탕스와 아들을 마르세유까지 데리고 가서 거기서 몰래 지내게 하고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때때로 만나러 가곤 했다. 어떤 날은 마르세유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차를 놓쳐서 저녁식사 시간에 늦을까 봐 30킬로미터 가까운 길을 헐레벌떡 뛰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까지도 전해진다.

 

세잔이 그렇게까지 아버지의 눈치를 본 것은 그의 생활이 완전히 아버지 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화의 역사를 크게 바꿔놓은 이 보기 드문 천재도 그 밖의 생활에서는 도무지 무능했다. 작품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따라서 그와 오르탕스와 아들에게는 매달 아버지가 건네주는 200프랑이 유일한 생활의 근거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화가가 된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전제적인 아버지가 아들이 멋대로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생활비마저 끊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러한 상황이 오르탕스에게 즐거운 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세잔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르탕스는 수다쟁이에다 사교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시민적 기질의 소유자로 예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세잔을 별로 돌보지도 않았다는 둥 평판이 매우 나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오히려 딱한 것은 오르탕스 쪽이 아니었을까. 설령 그녀가 세잔의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을 비롯하여 40점에 가까운 귀중한 걸작을 그리게 해준 점에서 우리는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만약 오르탕스가 없었다면 근대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몇 작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세잔의 초상화 세계에서 오르탕스가 빠진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세잔 작품의 주요 테마는 초기 낭만파의 이야기적 주제를 때면 거의가 풍경, 정물, 초상의 세 가지로 귀결된다고 해도 좋다. 이 중에서 풍경과 정물은 주변에 언제라도 있었다. 그러나 인물은 그렇지 않았다. 세잔이 그리고 싶을 때 언제나 모델이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 그의 예술은 시시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모델이 되기란 아주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잔의 작품을 가장 처음으로 이해해 준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그 괴로움을, 조금은 과장하기는 했겠지만,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모델이 된 볼라르를 위해 세잔이 특별히 준비한 것은 네 개의 가느다란 받침 위에 나무상자를 얹고 그 위에 다시 의자를 놓은 매우 불안정한 자리 였다. 볼라르는 그 의자에 앉아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어느덧 잠이 와서 자신도 모르게 꾸벅 졸게 되었고, 그 순간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세잔은 바로 큰소리로 화를 냈다.

 

“뭐 하는 거야! 포즈가 다 망가졌잖아.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어, 사과처럼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도대체 사과가 움직이냐고!”

 

그래서 다음 날부터 볼라르는 세잔의 아틀리에로 가기 전에 진한 커피를 듬뿍 마시고 갔다. ‘사과처럼 가만히’ 있는 고행은 매일 아침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시간 30분이나 계속되었다. 볼라르가 이런 고행을 115번이나 반복했을 때 세잔이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겨서 작업이 중단 되었다. 그때 세잔은 “어쨌든 셔츠 앞부분만은 다 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세잔이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갈 일이 없었다면 초상화 작업이 그 후로도 얼마나 더 계속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고행을 하면서까지 무명 화가의 모델이 되려고 하는 갸륵한 사람은 없다. 세잔이 거듭거듭 자화상을 그린 것도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자화상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 오르탕스의 초상이다. 세잔 친구들의 말처럼 그녀가 남편의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모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점만으로도 우리는 세잔과 함께 그녀에게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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