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고갱 이국적 환상 리뷰 2

 

종합주의의 미학

이러한 종교적 환상 회화들은 주제의 내용에서 이미 인상파와 정면으로 대립할 뿐더러 조형 표현에서도 인상파의 수법과는 정반대 방향을 보여준다. 사실 회화적으로는 야외 풍경 속의 ‘여성 입상’이라는 같은 모티프를 다루면서도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과 <이아 오라나 마리아>만큼 서로 다른 작품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모네는 시점을 낮은 곳에 두어 주요 모티프인 여성상의 전신을 거의 하늘로 떠오르게 한 데 반해, 고갱의 인물은 모두 다채로운 배경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상 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배경이 되는 풍경이나 인물을 파악하는 방식도 정반대다.

 

사실 모네의 작품에서는 풀도 인물도 하늘도 모든 것이 세세한 터치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을 다채로운 태양 빛 속에서 보려 했던 모네의 눈은 어떤 대상이라도 무수한 터치로 분석해 버리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았다. 이에 반해 고갱의 그림에서는 인물이나 과일과 같은 실질적인 무게를 가진 대상은 물론이고 꽃이나 잎, 나아가서는 길이나 풀로 덮인 대 지까지도 마치 가위로 오려내 붙여놓은 듯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명확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모네의 인물이 얼굴의 윤곽도 분명하지 않고 몸 전체가 빛의 미립자로 분해되어 공중으로 녹아 들어가간다고 생각될 만큼 애매한 존재인데 비해 고갱의 인물은 모두 철선과 같은 강한 윤곽선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풍요한 배경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엄연히 자기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맨 처음 이 작품에서 느꼈던 장식성도 실은 저마다 강렬한 색채를 지닌 명확한 형태들의 조합이 가져온 효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터치로, 그리고 마침내 점으로 분해하려 한 인상과 의 분할주의에 대해, 형태를 하나의 큰 덩어리로 파악하려 한 고갱의 수법은 ‘종합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분할’이 모토였던 것처럼 고갱 및 그 동료 화가들에게는 ‘종합’이 표어였다. 그리고 사실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1889년에 고갱이 중심이 되어 카페 볼피니 에서 열었던 기념할 만한 전람회는 ‘인상주의 및 종합주의의 전람회’라고 이름지었다.

 

물론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명확한 윤곽선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종합도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대상에 추상화된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상파의 색채 분할도 하나의 허구였다. 단지 모네는 그 허구에 의해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고갱은 종합이 현실 세계를 떠나 추상화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으면서, 아니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고갱은 더욱 자기 의 화면에 자연과는 다른 새로운 지적 질서를 부여하려 했다.

 

고갱의 이러한 의도는 1888년에 그린 <설교 후의 환영>에 이미 명백하게 드러난다. 같은 해 8월에 고갱은 브르타뉴에서 파리에 있는 친구 에밀 슈페 네케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 너무 충실하게 자연을 모사해서는 안 되네. 예술이란 하나의 추상이야. 자연을 앞에 두고 꿈을 꿈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추상을 끌어내게 그리고 결과보다는 창조 행위 자체에 한층 더 생각을 모으게. 바로 그것이 조물주가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며, 창조에 의해 신의 세계에까지 다가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라네…”

 

타히티 시절 고갱을 지배했던 미학이 이미 브르타뉴 시절에 분명하게 성립해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타히티의 여자

그렇다면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종교적 환상이라는 주제와 종합주의라 는 조형 미학에서 볼 때 1880년대 후반의 작품 <설교 후의 환영>을 이어받 은 데 불과할까. 1890년대의 고갱은 1880년대의 고갱에서 더 새로워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걸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와 <설교 후의 환영> 또는 <황색의 그리스도〉 사이에 겨우 몇 년의 간격밖에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를 그리고 나서 고갱은 10년 이상을 더 살았는데, 그 만년의 십몇 년 동안에 일어난 양식의 변화는 1890년 전후의 이삼 년 동안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에 비하면 아주 적다고 할 수 있다. 고갱이 진정한 고갱이 된 것은 바로 1891년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변화의 원천은 말할 것도 없이 타히티섬이다. 그가 가족도 친구도 고국도 버리고 혼자서 타히티로 건너간 것은 1891년 4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벌써 <이아 오라나 마리아>가 그려졌다. 이 훌륭한 꽃을 피운 씨앗은 훨씬 전부터 고갱 속에 있었지만, 실제로 꽃이 피려면 문명 세계를 멀리 떠난 남국의 풍토가 필요했던 것이다.

 

타히티 풍토의 영향은 첫째, 복잡하고 다양한 색채의 배합으로 나타났다. 1880년대의 고갱은 때때로 빨강과 노랑 같은 강렬한 색채를 드문드문 사용한 적은 있어도 이 작품에서처럼 강한 원색을 많이 복잡하게 사용한 적은 없었다. 브르타뉴 시절 고갱의 기본적인 색조는 오히려 수수한 편이었다. 그의 만년의 풍요한 색채 세계는 분명히 타히티의 체험이 가져다준 것이다.

 

더구나 풍요한 색채 세계에 수많은 이국적 풍물이 등장하는 것도 타히티 가 가져다준 두 번째 영향이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에도 화면 앞쪽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바나나 등 과일을 비롯하여 뒤쪽 배경의 야자나무와 그 밖의 남국의 식물들, 고갱 자신이 편지에서 친구에게 설명하고 있는 화려한 팔레오 등 이국적인 소품이 빠지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를 눈 깜짝할 사 이에 현실을 벗어난 이상한 세계로 데려다줌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는 생생한 원시적인 심성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여 지금은 먼 옛날의 기억으로만 남은 야성에의 꿈을 강렬하게 되살려준다.

 

그러나 타히티섬이 고갱의 작품에 미친, 무엇보다도 중요한 세 번째 영향은 새로운 인간상의 발견일 것이다. 1880년대 후반 이미 그는 하얀 베일로 머리를 가린 브르타뉴 지방 특유의 민속의상을 <설교 후의 환영> 등에서 모티프로 충분히 활용하면서 종합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브르타뉴의 민속의상은 오로지 모티프로서의 가치 때문이었다. 반면, 타히티에서는 새로운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이목구비가 크고 갈색 피부에 빛나는 늠름한 신체의 마오리족 남녀 는 종합주의의 모티프로서도 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교의 신상을 연상시킬 만큼 기묘하고 강렬한 용모는 화면에 새로운 심리적 차원까지 더해 주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에서 성모의 모델이 된 것은 고갱이 타히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살게 된 테후라라는 원주민 여자다. 테후라는 이 작품만이 아니라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파아투루마>, <마나오 투파파우> 등 많은 중요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 고갱은 테후라의 모습을 통해 마 오리족의 당당한 원시적 생명력을 전하려 했던 것 같다.

 

원래 <이아 오라나 마리아>의 구도는 1889년 만국박람회 때 고갱이 구입했다고 생각되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보로부두르 유적의 부조 사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합장한 두 여자의 포즈가 어딘가 어색한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고갱은 보로부두르의 부조에서 부처가 서 있는 장소에 테후라를 세우고 더구나 그녀를 성모로 바꿔놓았다. 이 그림에서는 분명히 테후라가 주인공이며, 고갱은 테후라를 성모로 그림으로써 화면에 정신적 차원을 더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거의 이교적인 새로운 생명력을 부어 넣 으려 했다.

 

역사적 배경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1848년 2월 혁명의 여파로 소란하던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화주의자 저널리스트로서 당시 열심히 문필을 휘둘렀지만 3년 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등장하자 고국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페루로 향했는데 도중에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갱은 그대로 4년동안 페루의 리마에 머물렀는데 소년 시절의 이 이국 생활이 나중에 남태평양의 섬에 대한 동경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1865년, 열일곱 살 때 하급 선원으로 시작하여 대서양 항로의 무역선에서 일하다가 몇 년 후 선원을 그만두고 파리의 금융회사 베르탱 상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취직하고 2년 후 그는 덴마크 여인 소피와 결혼하고 다섯 아이를 낳았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었더라면 그의 생애는 안정되고 평범한 시민으로서 삶을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차분한 회사원이었던 고갱의 마음속에 언제부터인가 ‘회화의 악마’가 살고 있었다. 1883년,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의 생활은 모두 예술에 바쳐졌다. 선배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도 아직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시대에 그것보다 더욱 새로운 고갱의 그림이 팔릴 리가 없었다. 그의 생활은 금세 궁핍해졌고, 가족을 돌보 지 않은 고갱에게 화가 난 아내는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가 브르타뉴 의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가 마침내 타히티섬에까지 간 것도 생활고에 쫓겨서 생활비가 저렴한 곳을 찾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891년 이후 타히티섬에서 2년 정도 살다가 1893년 잠시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타히티섬으로 갔다. 유럽의 문명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마침내 예술의 역사를 크게 바꿀 뛰어난 명작을 차례차례 만들어갔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