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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국가 행위자의 대두

근대 국제법이 서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래 3세기 이상 동안 국제법은 국가간의 법이라는 정의가 당연시 되었다. 당초 국가는 근대 국제사회의 유일 한 구성원들이었다. 국가는 국제법의 유일한 입법자요 수명자였다. 국제법이라는 용어 자체도 Inter-National Law였다. 다르게 표현하면 Law among Nations이었으며, Law for Nations이기도 하였다. 주권, 관할권 행사, 외교사절제도, 영토취득, 무력충 돌, 안전보장 등 국제법의 수많은 세부 주제들은 국가만을 행위 주체로 전제하고 그 내용이 발달되었다.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전통 국제 법에 도전하는 새로운 국제법관을 전개하였지만, 이들 역시 국가 중심적 사고의 틀 은 벗어나지 않았다. 국가주권의 절대성이 과거보다는 축소된 것은 사실이나, 그 핵심은 온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법의 정립과 운영에 있어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법주체 이외의 또 다른 실체들이 다방면에 걸친 활약을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미 법주체로 자리 잡고 있는 국제기구가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NGO, 다국적 기업, 개인, 국제테러조직은 물론 국가내 하위 기관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국제무대에 직접 나서고 있다. 최근 이들을 통틀어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라고 부른다.

특히 냉전 종식 이후 변화된 국제안보환경과 근래의 세계화 및 정보화의 물결 은 국제관계에서 주권국가의 역할을 크게 변화시키었다. 과거 국가는 국경과 국적 을 통하여 자신만의 배타적 관할권의 대상을 확정하고, 이에 대한 통제력을 전제로 대외활동을 하였다. 국가 이외의 행위자들은 국가를 통하여만 국제법 질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신기술 혁명으로 촉발된 정보화 시대의 도래는 국가간 국 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가상공간을 등장시켰다. 매우 저렴한 비용과 소수의 노력 만으로도 가상 공간을 통한 범세계적 네트워크의 형성이 가능하여졌다. 네트워크의 발달은 국경이나 국적에 구애받지 않고 공통의 가치와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는 국제적 집단을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이들은 단순히 다수인의 집합체에 그치지 않고, 현실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구축하였다. 동구 공산체제가 몰락하자 사적 행위자들이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역할과 책임을 부담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었다. 과 거 어느 시대에도 사람들의 생각, 자본, 정보가 오늘날과 같이 국경을 자유롭고 신 속하게 넘나들지 못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사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이제 공적. 정치적 영역으로 침투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고 국제적 의제 (agenda)를 직접 제기하며, 국제법의 형성과 이행 확보에 상당한 역할을 수행한다. 종래 국가들이 독점하였던 영역들이 점차 비국가 행위자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된 환경을 바탕으로 20세기 말부터 국제법 질서 속에서 비국가 행위자들 의 활동이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하였다. 바야흐로 주권국가로부터 이들 비국가 행위자로 국제법상의 권력이동이 일정 부분 현실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법 교과서 속에서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에 관한 서술은 수십년 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국제법 교과서들은 여전히 국가를 중심으로 한 국제법 주체론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만이 본원적 주체라는 전제하에서는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 국가행위의 정당성을 국제기구에 의하여 확인받고 (예: 개별국가의 무력사용에 대한 UN의 허가 결의), 국제기구의 결정이 국가나 정부의 정통성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리고 오늘날의 국제사회 에서는 국제 NGO, 거대 기업, 소수민족, 테러단체,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행위자 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운영이 주권국가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국가 행 위자에 의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국가 중심의 전통적 국제법 주체론만을 바탕으로 하여서는 오늘날의 현실 세계에서 국제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적용되는지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기존의 국제법 주체론은 20세기 중반부까지의 국제법을 설명하는데 편리한 수단이었지만, 21세기에는 국제 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묘사하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현재의 국제법 질서 속에서 최종적인 결정권은 결국 국가가 갖고 있다는 주장은 형식적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은 비국가 행위자의 활동반경이 국제법의 분야별로 차이가 크기도 하다. 인권과 환경분야에서는 매우 활발한 반면, 예를 들어 외교관계분야에서는 비국가 행위자의 역할 영역이 별로 없다. 최근에는 테러조직의 국제법적 통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하여간 국제정치학에서는 비국가 행위자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를 목격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 이가 많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좋든 싫든 국제법 역시 변화된 질서에 대응하여야 한다.

이제부터 해결하여야 할 문제는 비국가 행위자들의 등장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이고, 이는 국제법의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분석하는 일이다. 조만간 국제기구가 아닌 비국가 행위자들도 일정 수준 국제법의 주체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가? 비국가 행위자들의 등장은 단순히 국제법 질서에 몇몇 새로운 법인격자가 추가된다는 수적 증가만을 의미할 것인가? 아니면 법주체론에 대한 집착마저 포기 하여야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체제변혁이 올 것인가?

이제 주권국가들만을 중심으로 한 오늘의 국제법 질서 위에 비춰지는 지금의 햇살이 혹시 석양을 앞 둔 늦은 오후의 햇살은 아닌가를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국제법이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여러 관여자(stakeholder)들을 법적으로 적절히 소화하지 못하고 국제법의 외곽에만 방치할 경우, 국제법은 현실 의 국제사회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법질서로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률가는 나그네와 같아 내일을 대비하여야 한다”는 Cardozo 판사의 말은 국제법 연구자들 역시 명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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