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티첼리 프리마베라 리뷰 2

I. 비너스의 탄생 : 모순의 사랑의 여신

바다에서 갓 태어난 여신은 풍성한 금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수줍은 태도로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다. 아니, 서 있다기보다도 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모습이다. 비너스가 취한 포즈는 널리 알려진 대로 카피톨리노의 비너스를 비롯하여 선례가 많지 만, 특히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메디치의 비너스>와는 직접적인 영향 관계는 불분명하지만 꽤 닮았다. 대리석으로 된 <메디치의 비너스>가 묵직하고 안정된 부동성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바람처럼 경쾌하게 흐르는 듯한 움직임을 전신에 보여주고 있다.

인물상에서 거의 같은 모티프를 이처럼 대조적으로 표현한 예는 드물다. 아름다운 알몸을 한껏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신체를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신의 포즈 자체가 이미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그 모순은 사랑의 여신을 이루는 본질이다. 그녀는 한 없이 삼가고 정숙하면서 한편으로는 요염하고 관능적이다. 여신의 모순적인 속성은 그녀를 따르는 이들에게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화면 왼편에 사랑의 바람인 서풍이 님프인 클로리스와 껴안고 공중에 떠올라 서는 비너스에게 조용하게 사랑의 바람을 보내고 있다. 거의 알몸에 가까운 이 두 남녀의 모습이 관능적인 관계를 암시한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위로는 비너스의 사랑의 상징인 빨간 장미꽃이 흩날린다. 화면 오른편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시간’의 님프 호라이가 붉은 망토를 펼쳐서 비너스를 맞이한다. 호라이는 ‘시간’ 혹은 ‘계절’의 님프이며, 그녀가 내보인 의상을 몸에 걸치는 행위는 ‘하늘의 딸’이었던 비너스가 시간이 지배하는 세계, 즉 지상에 들어온 것을 나타낸다. 천상의 비너스는 지금 이 순간 현실 세계에 말 그대로 ‘상륙’하려 한다. 게다가 비너스는 ‘서풍의 관능성’과 ‘시간’의 님프가 지닌 청아함이라는 상반되는 성질을 겸비한 존재로서, 변증법의 논리에서 ‘서로 모순된 것의 통일’로서 등장한다.

이러한 구성은 <봄> 에서 서풍과 클로리스와 꽃의 여신, 혹은 삼미신의 관계와 완전히 똑같다. 또 그 표현법에서도 <봄>의 구도가 반원형의 아치 밑에 주요 인물을 배치하는 중세 이래의 전통적 수법을 계승한 것과 같은 모양새로 <비너스의 탄생>에서도 보티첼리는 중세 이래의 화면 구성을 답습했다. 이 패턴이란 기독교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세례’의 구성이다.

II. 두 명의 비너스 / <비너스의 탄생> = <프리마베라>의 짝꿍

‘세례’는 중세 미술에서 무수히 다루어진 주제이지만, 이를 묘사하는 방식은 일정한 패턴을 지닌다. 화면 중앙에 알몸의 그리스도가 정면을 향하고, 오른편에서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고, 왼편에는 그리스도가 벗어놓은 옷을 든 두 천사가 자리 잡는다. 예를 들어 로마네스크 시기에 제작된 피사의 대성당 서측 정면부 대문의 청동 부조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세례>와, 보티첼리와 거의 같은 시 기에 피렌체에서 활약한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서로 양식적으로는 다르지만 도상은 똑같다.

양쪽 모두 한복판에 그리스도가 요단강에 몸을 담그고 서 있고, 좌우로 세례자 요한과 두 천사가 자리 잡고 있다. 피사의 부조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대부분 강물에 잠겨 마치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그 강물이 좌우로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모습도 무척 부자연스럽지만 아직 원근법과 같은 통일적 시각상을 갖추지 않았던 중세의 조각가에게는 당연한 것이리라. 조각가는 그저 그리스도는 강에 몸을 담그고 있고, 요한은 강물 바깥에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려고 이런 표현을 구사했을 뿐이다. 피사의 부조에 담긴 정보는 베로키오가 무척 사실적으로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와 사실상 같다. 게다가 동방의 도상에서는 같은 구도에 좌우의 인물이 서로 바뀐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세례’ 그림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교해보면 기본적인 구도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중앙에 알몸의 인물이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고, 좌우로 세 명의 인물이 배치된 데다, 중앙의 인물은 물속에 있고, 화면 오른편의 인물 (요한, 호라이)이 뭍에 있으면서 중앙의 인물 머리 위로 손을 뻗은 것(요한의 경우 그리스도에게 물을 붓는 동작이고, 호라이의 경우는 비너스에게 망토를 입히는 자세이다), 게다가 반대편의 두 인물에게 날개가 돋아 있는 것(<세례>에서는 천사, <비너스의 탄생>에서는 서풍), 배경에는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가 보이는 것 등, 세부까지 분명하게 대응된다.

이처럼 ‘세례’를 묘사하는 방식은 콰트로첸토의 화가들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었다. 애초에 기독교 미술에서는 교리, 혹은 이야기의 내용과 의미를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아무래도 표현은 설명적이다. 예를 들어 ‘세례’에서 그리스도, 요한, 천사 등의 등장인물과 무대를 이루는 강과 열대성 식물은 불가결한 요소이며, 이들이 조합을 이루는 방식도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화면의 조형성을 무엇보다 중하게 여겨 설명적인 표현을 한껏 멀리했다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기본적인 규약은 따라야만 했다.

따라서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탄생>에서 ‘세례’의 구성을 차용했다는 것을 적어도 당시 사람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을 터이다. 어쩌면 보티첼리는 조형적인 효과뿐 아니라 처음부터 ‘세례’라는 더블 이미지를 통해 의미내용을 심화할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세례’가 하늘에서 내려 온 신의 아들 예수가 지상에서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 비너스의 ‘탄생’은 ‘하늘의 딸’이 이제부터 지상에서 활동을 개시하려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비너스가 지상에서 행한 ‘활동’이란 무엇이었을까? 미와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가져온 것이다. <봄>의 화면에 담긴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너스의 탄생>과 <봄>은 내용상으로 분명하게 연결된다. <비너스의 탄생>의 비너스가 ‘하늘의 딸’, 즉 천상의 비너스라면 <봄>의 비너스는 지상의 여신이다. 바르부르크와 혼이 일찍이 지적한 대로, 이 두 점의 작품은 두 명의 비너스를 각각 나눠 그린, 이른바 짝을 이루는 작품인 것이다.

이 두 걸작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상반된 성격을 지닌다. 공통점이란 앞서 본 대로 둘 다 비너스를 다룬 우의화이며, 거의 같은 크기의 화면에 여러 인물이 평면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두 작품 모두 화면 한복판에 비너스가 자리 잡고 있지만 그 모습은 대조적이다. 천상의 비너스는 갓 태어난 아름다운 알몸이지만, 지상의 비너스는 풍성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탄생>의 여신이 불안과 부끄러움의 표정을 보이고 있는 것과 달리 <봄>에서 비너스는 차 분한 보호자와 같은 모습이다. 알몸의 비너스가 소녀의 부끄러움을 보이고 있다면, <봄>의 비너스는 모친의 듬직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끄러움과 듬직함 모두 사랑과 미의 여신의 중요한 속성이다. 평면적인 구도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면서 화면의 운동 방향이 반대인 것도, 애초에 이 두 작품이 한 쌍으로서 구상되었다면 납득이 가는 노 릇이다. 요컨대 보티첼리의 이 두 걸작은 르네상스 예술에서 즐겨 다룬 ‘두 명의 비너스’의 변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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