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절규 리뷰

I. The Bloody Sky <절규1> 1893

비록 피비린내나는 전쟁이나 순교를 묘사한 그림이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다면 그것을 보는 관람객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차분해진다. 철저히 제3자가 되어 작품속의 비극에 최대한 감정이입을 하려 애를 씀에도 그때 느끼는 감정은 불안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세상만사 모든것에 예외가 있듯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끔 하는 미술 작품들도 분명 존재한다.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바로 그런 예외중 하나이다. 즉 불안에 차 있는 그림속 대상을 보는 우리도 불안함을 느낀다. 사실 고난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작품들 또한 어느정도 불안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들은 모두 종교화로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장면들까지 묘사가 되어있다. 하지만 뭉크의 <절규>에는 그 어떠한 구원도 없다.

해골을 연상시키는 그림속 인물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어떤 도움을 청하는 것 같다. 별 생각없이 그림을 보면 제목이 암시하듯 그림속 인물이 영화 <나홀로 집에> 케빈처럼 손을 두 볼에 올린채 ‘절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손의 위치를 보면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귀를 가리고 있다. 마치 외부에서 들리는 무언가의 ‘절규’를 애써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절규를 듣고 있는건가? 아니면 동시에 같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건가?

그림의 구성은 특별하지 않다. 노을이 지는 하늘과 북유럽의 피오르가 뒤의 배경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평범한 다리가 있고 다리 위 저쪽에 두 남자가 화면에서 사라지기 바로 직전이다. 그리고 해골을 연상시키는 주인공은 무엇때문에 두려워하고 놀랐고 또 무엇때문에 기괴한 입모양을 내면서까지 소리를 지르는지는 그림상 알수가 없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그 주인공이 불안함과 두려움을 심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인데, 나중에 뭉크가 한 말을 들어보면 이건 뭉크 자신의 불안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두 친구와 함꼐 길을 걷고 있었다. 마침 석양 무렵으로 하늘이 핓비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을 느꼈고, 기진맥진해서 죽은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파란 피오르와 마을 위로 불과 피의 혀가 너울거리며 돌아다녔다. 친구들은 먼저 가버리고 나만 뒤에 남았다. 그때 무엇인지도 모르는 공포에 떨면서 자연의 큰 절규를 들었다…”

즉, 화면속 주인공은 뭉크이며 뭉크는 자연의 절규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절규를 귀로 막고 있던 것이다. 뭉크 자신의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뜻밖의 불길한 세계가 눈 앞에 놓일때 두려운 환상 세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뭉크는 그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II. 자연의 절규 <절규2> 1893

앞서 살펴 봤듯이, 뭉크의 대표작 <절규>에서 뭉크의 몸을 꿰뚫고 들어온 것은 자연의 큰 절규였다. 그 자연의 절규를 들고 두 귀를 막고 있는 해골같이 묘사된 뭉크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얼마나 깊은 두려움과 충격을 받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자연의 무서움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한 그림은 서구 미술사에서는 사실상 뭉크 <절규>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여백의 미를 나타내며 풍경화를 발전시켜온 동양과 달리, 서구 예술에서 자연이 독립된 존재로 회화의 대상이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풍경화가 개별 장르로 성립된 것은 17세기가 지나고 나서다. 대부분 자연 그자체보다는 종교적 상징 내지 장식물로만 등장해왔다.

물론 자연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티첼리 <봄>에서 묘사된 자연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 당시 종교적인 색채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독립된 회화의 주체는 아니었다. 16세기가 지나가면서 요아힘 파티니르의 작품에서는 풍경자체가 화가에게 흥밋거리가 되어갔지만 메인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다 17세기에 풍경화라는 장르가 성립되었는데, 여전히 네덜란드 풍경화는 시민 생활의 배경으로서 자연을 묘사했고 프랑스 고전주의 풍경화도 자연은 신화 내지 민담을 담은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러다 18세기가 되어 인간과 별개의 주체로 자연 자체가 화면을 지배한 것은 18세기 후반 영국 풍경화부터다.

18세기 후반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가 폭풍, 눈사태, 벼락, 눈보라와 같은 자연의 무서운 파괴력을 훌륭하게 재현해낸다. 즉, 터너의 자연은 차갑고 무자비하며 그것을 그림을 보는 사람들도 알 수 있다. 즉, 이해할 수 있는 두려움으로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뭉크의 <절규>에서의 자연은 광폭하게 날뛰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자연정경이다. 멀리 피오르에 떠 있는 배는 고요히 물위를 떠돌며 하늘은 밝게 노을에 물들어 있다. 노르웨이의 수많은 해안 도시들의 지극히 평범한 저녁 풍경임은 틀림없으며 그 어떤 것도 인간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볼수가 없다. 그럼에도 에드바르 뭉크는 본인의 불안과 전율을 느끼고 있음을 강력하게 표현했다. 도대체 명화 <절규>속 그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면 결국 뭉크의 <절규>속에서의 불안은 뭉크 자신 내면의 불안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뭉크는 <절규>이고 <절규>가 곧 뭉크이다. 그 불안의 근원을 살펴보자.

III. Memento Mori – <병든 아이> 1885

뭉크는 평생 죽음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1863년  추운 겨울, 노르웨이 한 농장에서 다섯 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난 뭉크는 태어났을때부터 병약했으며 선천적인으로 류머티즘을 앓아 평생 관절염과 열병에 시달렸다. 그러다 5살이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여의였다. 그런데 아내의 사망이후 뭉크의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이후 우울증을 보이며 가족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과 매일매일 지속되는 불안속에서 뭉크가 기댈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한살위 누나 소피에였다. 그런 누나가 14살에 어머니와 같은 이유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일찍 떠난 누나가 원망스럽기도했고 그런 누나를 못지킨 자신이 밉기도 했다. 어머니와 누나와의 이별은 평생 뭉크를 쫓아다니는 망령이 되었고 뭉크에게는 “나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의 근원이 되었다.

거기에 이렇게 인생을 알기도 전에 어린 뭉크는 병마, 죽음 그리고 정신적 불안정을 겪었다. 이런 뭉크의 심리상태는 당연하게도 매우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슬프고 아픈 잔상이 남아있었지만 예술가답게 뭉크는 이 모든 고통과 불안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오히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뭉크의 레퀴엠의 시작을 알리는  1885년 뭉크의 첫 작품이 바로 <병든 아이>이다.

<병든 아이>는 누가 봐도 뭉크의 누나가 15세에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더듬으면서 탄생시킨 것이다. 그림을 좀 더 가까이 살펴보자. 병에 시달려 창백해진 소녀가 힘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의 시선은 초점을 잃은채 공허해보인다. 그녀가 바라보는 어두운 빛깔의 커튼의 색채는 죽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소녀 곁의 여인은 어떻게든 그녀를 잃기 싫다는 듯 소녀의 손을 꽉 잡고 있지만 동시에 그 여인의 무기력함도 동시에 느껴진다.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왕진을 갔던 뭉크는 병상에 누운 소녀를 본 경험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경험과 함께 누나의 기억을 떠올려 당시 느꼈던 복잡 미묘한 심경을 우울하면서 아련한 색채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림의 흔들리는 터치처럼 모든 것들은 다 분해되고 해체될 것이다. 새벽안개보다 더 스산한 그림이다.

뭉크는 1885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40여년 동안 <병든 아이> 주제의 그림을 여러점 그렸다. 즉, 평생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을 의식하며 살았던 것이다. 유화만 6점을 그렸고, 석판화, 드라이포인트, 에칭으로도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소녀와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 전체를 그린 것도 있고, 소녀의 얼굴 부분만 클로즈업한 것도 있다. 소녀는 항상 옆열굴만 나온 프로파일 형태로 그려졌는데, 소녀의 머리 뒤에는 크고 흰 베개와 거울의 일부가 보인다. 뭉크가 <병든 아이> 시리즈에서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치 흰 베개와 거울이 소녀 뒤에 마치 후광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사실 자신의 경험과 트라우마를 작품주제로 작업을 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전례가 없던 시도였다. 이 때문에 뭉크를 예술 주제를 자신과 자신의 삶에서 찾아서 감정을 표출한 표현주의의 선구자라 부르게 된다. 이때부터 뭉크의 캔버스에서는 신화, 종교, 풍경, 누구나 알만한 사람의 얼굴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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