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 올랭피아 리뷰

I. Olympia by Manet – 최대의 스캔들을 일으키다

침대 위에 느긋하게 누워 우리를 지그시 쳐다보는 이 여자만큼 발표 당시 큰 소동을 일으킨 작품은 서구 미술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었다. 만약 있다면 마네가 1863년, 즉 이 <올랭피아>보다 2년 전에 ‘낙선전’에 출품한 <풀 밭 위의 식사> 정도일 것이다. <올랭피아>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직후에 그려져서 1865년 살롱에 출품되었는데 반응들은 당연 부정적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출품 때는 마네에게 호의적이었던 쿠르베마저 <올랭피아>를 보고 ‘방금 목욕을 마친 스페이드의 여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 기사와 여러 비평들은 다음과 같은 조롱과 공격을 퍼부었다.

‘배가 누런 창녀’

‘인도산 고무로 만든 암컷 고릴라’

‘출산을 앞둔 부인과 지체 있는 집안의 자녀들은 아무쪼록 피해서 지나가야 할 작품’

공격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마네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위와 같은 조롱들이 요즘 표현으로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매일 많은 사람들이 그 ‘천박하고 뻔뻔스러운’ 작품을 한번 보겠다고 살롱 전시장에 모여든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 앞에는 당연히 매일 많은 사람이 떼로 모여들었다.

그해의 살롱 전시장은 화가들의 불만을 막기 위해 작가 이름에 따라 알파벳순으로 작품을 걸었는데, 소란이 너무 심해지자 주최 측에서 <올랭피아>만 일부러 맨 마지막 방에, 그것도 ‘그때까지 아무리 시시한 졸작이라도 걸린 적이 없을 듯한’ 어두운 벽으로 옮겨 걸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앞에 무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팡이로 작품을 두드리는 사람도 적지 않아서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그림을 위에다 걸 수 밖에 없었다.

II. 논란의 시작

1. 벌거벗은 여자? 침대위 대담한 포즈?

그럼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그렇게 큰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을까. 1. 벌거벗은 여자? 단순히 벌거벗은 여자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벌거벗은 여자 그림은 르네상스 이래 수도 없이 그려져 왔고 당시 루브르미술관에도 엄청 걸려 있었다. 2. 침대위 대담하게 누운 포즈? 신화속 여신이 아닌 세속의 여성 인간이 요염하게 누운 것을 그렸다고 사람들이 화났는가? 이것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올랭피아>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그려진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에 사람들이 먼저 화를 냈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네는 일찍부터 스페인 회화에 빠져 있었기에 <올랭피아>를 그릴 때 틀림없이 고야의 작품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있는 티치아노의 명작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분명히 <올랭피아> 모티프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마네와 티치아노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마네가 티치아노의 구도를 고스란히 빌려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 우르비노의 비너스

마네의 <올랭피아>와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침대 위에 가로누운 벗은 여인을 크게 클로즈업한 것, 배경은 한가운데에서 좌우 두부분으로 나누어 진 것, 오른쪽에는 하녀를 두는 기본적인 구도, 벗은 여인의 겹쳐진 다리, 손의 위치, 팔찌와 반지등의 장식, 하얀 시트가 화면 왼쪽 아랫부분에서 베개 밑으로 딸려 들어가 삼각형으로 접힌 것에 이르기까지 두 그림은 완전히 같다.

굳이 두 작품간의 모티프 차이를 찾자면 여자의 발치에 있는 애완동물 차이점과 하녀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먼저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웅크린 개이고 마네의 그림에서는 등을 쭉 편 고양이라는 것 그리고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하녀가 두 사 람이고 조금 멀리 떨어져서 의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비해 마네의 그림에는 흑인 하녀가 그녀의 팬 중 한 명이 보낸 듯한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고 있는 것 정도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일찍부터 전 유럽에 명작으로 알려져 있었고 마네 또한 수업 시절에 그것을 모사한 것이 남아 있을 정도이므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작품을 잘 알고 있었다. 티치아노의 여신이 뻔뻔스럽다든가 천박하다고 비난받은 적이 없다면 <올랭피아> 역시 적어도 포즈가 대담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는 셈이다. 근데 왜?

3. 흑인 하녀

벌거벗은 여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흑인 하녀가 꽃다발을 전하러 온 것이 너무나 뻔한 내용을 암시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이 역시 넌센스다. 사실 벌거벗은 여주인에게 꽃다발을 내미는 흑인 하녀라는 모티프 또한 마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842년 살롱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은 장 잘라베르의 <오달리스크>에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잘라 베르는 지금은 완전히 잊혔지만 당시에는 매우 인기 있었던 통속적인 아카데미파 화가로, 그의 <오달리스크>는 살롱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 모티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말하자면 트집이다. 정리하면, 이 작품에 그려진 모티프 자체는 사람들의 분노를 살 만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특징과 역사적 의미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들을 살펴보자.

III. Olympia by Manet – 마네의 팩트폭행

1. 왜 당시 관객들이 화를 냈는가?

<올랭피아>에 대한 당시의 저널리즘과 시민들의 비난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얽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요소는 그 시대다. 나폴레옹 3세 정부는 마네의 친구였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고발했던 정부다. 나폴레옹 시대의 외면적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독재 치하 시대와 마찬가지로 제2제정은 19세기 프랑스에서 풍기 단속이 가장 엄격했다. <올랭피아> 같은 젊은 여인에게는 살기 좋은 시대가 결코 아니었다.

2. 마네의 전과

마네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마네는 <올랭피아> 출품 2년쯤 전에도 <풀밭 위의 점심식사>을 망설임 없이 발표했다가 된통 공격을 받았다. 이 그림에서도 벌거벗은 여자가 당시 유행하는 옷차림의 두 남자와 함께 있다는 당대 상위층의 팩트를 노골적으로 상기시킨 것이 비난의 주된 대상이었다. 어떤 비평가는 “더 이상 벗으려 해도 벗을 수 없을 정도로 벗고 있다”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마네가 한층 더 생생 하게 ‘벗었음’을 여봐란듯이 발표하면서 사람들에게 팩트 폭격을 한번 더 했던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올랭피아>가 자신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파리의 여자라는 것과 그 여자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나오는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물론 마네도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두 작품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젊은 여성으로 마네가 파리의 카르티에라탱(대학가)을 걷다가 우연히 보고 모델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마네의 마음에 드는 모델이었는지 두 걸작 이외에도 1860년대 마네의 작품에 종종 등장한다. 마네는 이 모델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렸다. 그것이 사람들의 분노에 한층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3. 들켜버린 관음행위 = 팩트 폭행

하지만 위 두개 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올랭피아>가 당시 남성 관객들의 치부를 건드린 것이다. 즉, 그들을 뜨끔거리게 한 것이다. 사람은 사실 앞에서 웃음이 빵터지거나 아니면 화를 낸다. 그렇다면 당시 관객들이 <올랭피아>를 보고 격노한 것은 <올랭피아>가 팩트 폭행을 해버린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 그 그림이 어떤 팩트 폭행을 한 것인가? 관객들의 어떤 치부를 건드린 것인가? 

당시 아카데미 화가들이 그리던 관능적인 여성 나체화는 티치아노의 경우처럼 반드시 신화나 역사의 알레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이 벌거벗고 누운 그림이라면 즐겨 감상하던 사람들도, 전람회장을 나오자 마자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한 젊은 여인의 옷을 벗겨 구경거리로 만든 작품에는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올랭피아>를 비난한 사람들의 분노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말한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위선적인 분노와 비슷한 것이었다.

IV. Olympia by Manet – 트럼프의 그림

회화의 역사에서 볼 때 <올랭피아>에서 마네는 르네상스 이래로 안정된 길을 걸어온 서구 회화에 정면으로 큰 의문을 들이대고 있다. 풍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올랭피아>는 당시 사회에 대한 반역이었지만 회화 표현에서 보자면 그 작품은 서구 400년 회화 역사에 대한 반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사회에 대한 반역자를 자처한 쿠르베는 그 점을 미리 간파하고 <올랭피아>가 불러일으킨 사회적인 반향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회화 표현에 던진 문제에 관해서는 넘어갈 수 없었다. <올랭피아>를 ‘금방 목욕을 마친 스페이드의 여왕’이라고 한 평에서 쿠르베의 생각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올랭피아>는 스페이드의 여왕처럼, 예컨대 트럼프 카드의 그림처럼 명확한 윤곽선과 평탄한 색면으로 되어 있다. 즉, 마네의 작품에서는 깊이를 부정하고 이차원의 평면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 때문에 <올랭피아>와 마네가 오마주한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구도상으로 유사하지만 표현상에서는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배경 오른쪽 뒤편의 바닥 무늬가 원근법에 의해 그려져 있는데 반해 마네의 그림에서는 아무 무늬도 없는 밑칠로 바뀌어 있다. 또 여인의 겹쳐진 두 다리를 보면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는 오른쪽 다리를 뒤쪽으로 조금 굽힌 결과 강한 음영에 의해 입체감을 이루고 있지만, <올랭피아>에서는 두 다리가 거의 평행인 채로 있어 음영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허벅지 위에 놓인 왼손도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팔꿈치부터 위쪽이 그림자에 잠겨 있지만 마네의 그림에서는 거의 단색에 가까운 크림색으로 평탄하게 칠해져 있다.

또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목을 조금 돌려서 얼굴이 약간 비스듬하게 그려졌고 그에 따라 목 근육과 뺨, 혹은 아래위 입술에서 미묘한 입체감 표현을 볼 수 있지만 <올랭피아>에서는 음영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서 몸이 거의 평탄한 색면으로 되어 있다. <올랭피아>가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비해 훨씬 더 윗몸을 세우고 있는 것도 얼굴과 상반신을 정면에서 평 면적으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마네의 그림은 완전히 평면적인 장식성을 가진 트럼프 그림처럼 되어 있다.

이러한 <올랭피아>의 이차원적 표현은 대상의 깊이나 두께, 둥글음을 나타내려고 했던 르네상스 이래 서구의 사실주의적 표현과는 반대된다. 마사초 이래로, 아니 훨씬 거슬러 올라가 조토 디 본도네 이래로 서구의 회화는 이차원의 화면에  원근법과 명암을 통해 삼차원의 현실 세계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거듭해 왔다. 그런데 쿠르베조차 의심한 적이 없는 그 전통 기법을 마네의 <올랭피아>는 거의 전면 부정하고 있다.

V. Olympia by Manet – 데생과 색감

마네는 애초에 삼차원의 세계를 화면에 구축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원래 대상의 입체감과 캔버스의 이차원성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마네의 작품에서는 아슬아슬하게 기적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침대 위의 빅토린 뫼랑이 스페이드의 여왕이 아니고 그녀의 육체가 지닌 부피와 무게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전통적인 명암이나 입체감 표현 기법에서 비롯되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육체의 볼륨은 윤곽선의 훌륭한 데생과 장밋빛이 감도는 피부색의 미묘한 색감에 의해 적확하게 포착된다.

첫째, 정확한 데생만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기법은 당시 유럽에서는 낯설었던 일본 우키요에 스타일로부터 마네가 영감을 받아서 구현된 것임이 틀림없다. 이 일본 미술 기법이 마네에게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을 것인데, <올랭피아>가 그려진 시기는 프랑스 제2제정기로 당시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가 대량으로 유럽에 소개되어 파리나 런던의 애호가들에게 사랑받았던 때이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올랭피아>의 데생은 티치아노의 여신뿐만 아니라 일본의 우키요에 스타일의 느낌도 준다. 마네와 그의 동료들 역시 이 이국적 판화의 대담한 표현에 매혹되었음은 마네가 그린 에밀 졸라 초상화 배경에 일본의 우키요에와 화조도 병풍이 그려져 있음을 보면 유추할 수 있다. 그뿐이랴. 아래와 같은 그림은 현재 미술가들도 일본 스타일에 어지간히 영향을 받지 않고는 선뜻 그리기로 마음 먹기가 힘들 것이다.

둘째, 마네의 날카로운 색채 감각을 빼놓을 수는 없다. 사실 마네의 화면 구성은 창의성이 풍부하다고 할 수 없다. <올랭피아>는 <우르비노의 비너스>으로부터,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으로부터, 친동생의 부인 베르트 모리조를 그린 <발코니>는 고야의 동명 작품으로부터 구성을 빌렸다.

그럼에도 우리가 <올랭피아>를 높게 평하는 이유중 하나는 바로 그 색감에 있다. 마네는 개개의 모티프를 다루는 솜씨 특히 물감을 쓰는 방식에서는 정말 명인이었다. 우리가 <올랭피아>에서 빅토린 뫼랑의 생생한 육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주로 마네의 절묘한 색채 표현의 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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