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국제법의 역사 Part.2
III. 유럽 국제법의 범세계적 확산
유럽국가들은 인종적·문화적·종교적·역사적으로 공통의 배경을 갖고 있었 기 때문에 초기 유럽 국가간에는 국제법의 합의와 적용이 용이하였다. 유럽국가의 왕실은 혈연적으로도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당시 유럽 국가들은 국가 가족(family of nat of nations)이라고도 불리웠다.
유럽국가 상호간의 법으로 출발한 국제법은 유럽 세력의 범세계적인 진출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적용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유럽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무력을 바탕으로 비유럽지역을 식민지화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유럽국가들은 이중 적인 기준에서 자신들의 법을 강요하였다. 유럽의 국제법은 그들 상호간에만 대등 하게 적용될 뿐이었다. 비유럽지역은 단지 국제법의 객체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유럽국가간의 공법은 문명국가간의 법으로 둔갑되었다.
당시의 국제법은 주로 유럽의 몇몇 강대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국제법은 무력사용을 국가의 고유한 권리로 인정하였다. 자국민이 외국에서 피해를 입으면 이를 본국의 손해로 간주하고, 본국의 개입을 허용하였다. 중앙집권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부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국제법적으로 무주지로 간수하여, 어떤 국가라 도 선착순으로 차지할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이러한 국제법상의 권리들은 오직 강대국만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결국 국제법은 유럽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의 결과를 합리화시켜 주 는 이론적 도구가 되었다. 국제법의 승인이론은 비유럽지역의 식민지화를 이론적으 로 정당화시켜 주었다. 영토취득 권원에 관한 이론 중 특히 선점이론은 유럽국가들 간의 식민지 쟁탈경쟁에 관하여 합리적 규칙을 제공하고 그들의 전과를 합법화시켜 주었다.
1776년 독립한 미국이 비유럽국가로서는 최초로 국제법의 주체로서 국가 가족의 일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으며, 19세기 중엽의 일부 중남미 국가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들 국가 역시 아직 변방의 국가들이었다.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 국 가들은 유럽국가와 조약을 체결하여도 대등한 위치에서 체결되지 못하였고, 이들에 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조약이 강요되었다.
결과적으로 19세기까지의 국제법은 유럽이라는 지리적 기초 위에 성립되어(유 럽의 법), 기독교라는 종교적 영감에 영향을 받으며(기독교도의 법), 경제적 동기(중상 주의적 법)와 대외팽창적 목적(제국주의적 법)을 가진 일련의 법규칙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17) 국제법은 유럽국가만을 국제법의 완전한 주체로 인정하면서, 전 세계 적으로 팽창하는 그들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명문화시켜 주는 법적 도구인 셈이었다.
당시 실증주의적 법률관이 일반화됨에 따라 국제법은 주권국가의 중대 이익이 나 안전보장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분야에서는 발전을 보기 어려웠다. 국가적 중대 이익이 관련된 분야에 있어서는 국가간의 합의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국 제법은 비정치적이기는 하나 국제협력의 필요성이 높았던 분야부터 두각을 나타내 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국제법은 내용적으로 비정치적 분야, 즉 행정적·경제적·과학적 분야에서 국제협력과 국제거래를 조정하는 기술적 규범을 급속히 발전 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국제법이 효과적인 국제협력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자조약과 국제기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었으며, 다음 세기 국제법의 새로운 도약을 가능 하게 만든 디딤돌이 되었다.
IV. 현대 국제법의 전개
국제법은 제1차 대전을 계기로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접어든다. 전쟁이 종료 되었을 때 서유럽 국가들은 더 이상 지난 수 세기 동안과 같이 국제사회를 좌지우 지하는 중심세력이 아니었다. 신흥 강국인 미국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국제규범이 만들어질 수 없었고, 공산국가인 소련의 출현은 국제규범의 이행과 형성에 있어서 새로운 형태의 분열과 갈등을 의미하였다. 비 유럽지역에서의 독립국가의 증가는 국가간의 동질적 요소를 희석시켰다. 국가간 동질성의 약화는 국제법에 있어서 가 장 중요한 법원이었던 관습국제법이 발달하기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결국 국제법에 서 조약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되었다.
흔히들 제1차 대전 이전의 국제법을 고전기 국제법이라 부르고, 이후의 국제 법을 현대 국제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즉 고전기 국제법은 주권국가만을 유일한 국제법의 주체로 보았으며, 최고의 권한을 가진 주권국가의 전쟁수행권은 국제법에 의하여도 규제되지 못하였다. 국제법은 유럽국가간의 법이었으며, 국제법의 확산이 란 비 유럽지역에 대한 유럽 공법의 강요를 의미하였다.
반면 20세기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국제법의 구조변천이 시작되었다. 주권국가 외에 국제기구도 국제법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국가주권 절대의 원칙은 약화되었 고, 국가의 무력사용권에 대한 통제가 시작되었다.
제1차 대전을 계기로 국제연맹이 탄생하였다. 제1차 대전은 국제문제에 관 하여 일정한 발언권을 갖는 지구상의 주요 국가가 모두 참여하였던 전쟁이었다. 이 제 주요 국가들은 지구 건너 편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하여도 과거와 같이 무관심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협력기구가 필요함을 처음 으로 실감하였다. 그 결과물로서 탄생한 국제연맹은 국제사회가 처음으로 시도한 세계적 성격의 국제정치기구였다.
1국 1표제에 입각한 국제연맹의 출범을 통하여 유럽국가와 비유럽국가간의 법적 지위상의 차별이 공식적으로는 종료되었다. 국제연맹은 안전보장, 군비축소, 국제행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상설 국제분 제품 탄생시킴으로써 국제재판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연맹 규약은 주권국가가 전쟁을 수행할 권리 에 대하여 절차적 통제를 시도하였다. 국가가 분쟁해결을 위하여 곧바로 전쟁에 돌 입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최소한 3개월의 냉각기를 갖도록 요구하였다. 국제적 판정이 내려진 경우 이에 승복하는 국가를 상대로는 전쟁을 개시할 수 없었다.
국제사회가 국가의 전쟁 수행권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국제법의 본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일방 국가가 타국에 대한 무력사용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거나 심지어 강제병합시키는 행동을 국제법이 통제할 수 없다면, 국가간의 합의인 조약의 준수의무가 과연 진정한 법적 의무인가를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 국 제법이 국가의 전쟁 수행권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 박조약으로 무효라는 주장이나, 1910년 병합조약에 의한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가 체결절차상의 하자가 있는 조약이라는 주장은 교과서 속에서는 존재할 수 있는 이 론일지 모르나, 국제사회의 현실정치는 이러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19세기 말까지 국가주권 절대론자들의 국내법 우위설이 득세하였고, 국제법은 국가 의 대외적 행위준칙 정도로 평가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국제법이 국제사회에서의 무력사용의 통제를 시작할 무렵 국제법과 국내법의 관계에 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국제법의 구조변화는 제2차 대전과 UN의 탄생으로 더욱 가속화된다. 제2차 •대전을 통하여 인류는 전쟁의 참혹함을 더욱 절감하였고, 국제법이 국가주권을 더 욱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범세계적 · 포괄적 국 제기구로 UN이 창설되었다. UN은 원칙적으로 자위(自衛)를 목적으로 한 무력사용 외에는 전쟁을 위법화시켰으며, 국제평화의 위협과 파괴에 대한 집단적 대처기능을 강화하였다. 국제사회에서 무력행사의 위협조차 금지시켰으며, 개별 국가의 고유한 •권리인 자위권에 대하여도 행사기준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강화된 임무를 담당하기 위한 기관으로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안전보장이사회가 설치되었다. 한편 인권의 국제적 보호가 UN의 주요 임무의 하나로 선언되었고, 이의 구현을 위한 조직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UN 내에 국제법위원회(ILC)가 설립되어 국제법의 점진적 발전과 법전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다른 한편 소련 등 공산국가들과 제2차 대전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은 전 통 국제법에 대한 도전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전통 국제법이 서구국가에게만 일방 적으로 유리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바탕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 혁명으로 출범한 소련을 시발로 제2차 대전후 공산국가들은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여 집단적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국제법이란 기껏해야 서구국가들간에 통용되던 법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공산국가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신 개념의 국제법을 주장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에 따르면 법이란 지배계급의 의사의 반영이다. 이를 국제법에 적용한다면 지배계급이 다른 공산국가와 자본주의 국가간에는 공통적인 법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에 공산혁명 초기에는 세계에 2개의 국제법 체제가 적용되고 있다거나, 국 제법이란 조만간 다가올 자본주의 세력과 공산 세력간의 결전의 시기까지 과도적 으로만 적용되는 존재라는 이론도 전개되었다. 그러나 공산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 의 공존이 장기화되자, 점차 국제법의 역할은 국제사회에서 공산체제의 이익을 극 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제2차 대전 직후까지는 국제사회에서 공산국가 가 수적으로 열세였으므로, 이들은 국제법의 정립에 있어서 국가의 합의를 특히 강 조하였다. 주권존중과 내정 불간섭 역시 강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공산국가들은 전통 국제법에 대한 이상주의적 도전자라기 보다는 실증주의적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국가의 등장은 냉전(cold war)을 초래하여 UN의 집단안보구상이 무력화되기도 하였다. 이후 공산국가들은 서구국가들의 식민지배 로부터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과 연대하여 국제무대에서 한때 쉽사리 수적 우위 를 점하기도 하였으나, 1980년 후반부터 동구 공산국가들의 체제변화로 인하여 현 재는 그 비중이 크게 쇠퇴하였다.
제3세계 국가들은 그중 많은 수가 식민 피지배의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반서 구적 경향이 강하였다. 이들 국가는 1국 1표주의가 적용되는 국제기구를 무대로하여 때로 공산국가들과 연대하며, 천연자원에 대한 영구주권론이나 민족자결권과 같이 이제는 국제법의 기본원칙의 하나로 자리 잡은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은 이념적 분포가 다양하여 국제사회에서 항시 통일된 국제법관을 제시하기 어려웠고, 특히 냉전 종식 이후의 국제질서의 변화는 이들로 하여금 독자적 입지를 고수하기 어럽게 만들고 있다.
20세기 후반 국제사회의 변화에 따라 국제법 역시 다양한 분야로 발전의 지평 을 확대하였다. 국제인권법이 급격히 발달하여 인권의 국제적 보호라는 개념은 이 제 개인의 일상생활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자국에 의하여 인권 침해를 당한 개인은 이에 대한 구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발달하고 있다. 국제법의 중대한 침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형사재판소도 설립되었다. 오늘날에는 인 권의 보호 없이 국제평화의 달성도 어렵다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한편 WTO로 상징되듯 현대사회에서는 범세계적인 국제경제질서의 구축도 일반화되고 있다. 20 세기 후반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 고조를 배경으로 국제환경법이 국제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분야의 국제법들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발전을 시작하였지만, 점차 국제법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높여 가고 있다. 국제통상법, 국제인권법, 국제 환경법 등 새로운 분야 역시 내용에 있어서 상호 영향을 주고 있으며, 자신의 법규 칙을 이행함에 있어서 다른 분야의 의존하기도 한다. 이는 국제법상의 다양한 가치 가 더욱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국제사회가 과거에 비하여 더욱 통합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국가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에서도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의 중 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현대의 국제사회에서는 중급 규모의 국가 이상의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국제질서의 운영에 다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기업의 활동 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국제민간기구(NGO) 역시 이미 국제법의 정립과 실행에 실질적으로 중요 역할자로 자리 잡고 있다. 9.11 사태를 통하여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국제테러조직도 주권국가의 무력사용에 못지 않은 파괴력을 행사할 수 있 다. 국제법상 개인의 역할도 날로 중시되고 있다. 이제 기존의 주권국가 중심의 국 제법 체제는 이러한 국제사회의 변화를 충분히 소화하기 어렵게 되었다. 앞으로 이러한 현실과의 괴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는 21세기 국제법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