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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제법의 역사 Part.1

오늘날의 국제법은 유럽 국가간의 국제법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근대 유럽 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던 법질서가 유럽 세력이 범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동반 하여 전세계적으로 적용되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국제법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에 국제법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불가피하게 근대 유럽의 역사 속에서 국제법이 어떻게 발달하였나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국제법만에서의 현상은 아니고, 대부분의 법분야에서의 공통된 현상이다.

1. 근대 국제사회의 성립과 국제법

독립된 정치 공동체가 다른 정치 공동체와 교류를 가질 때는 항상 상호관계를 규율할 법질서를 필요로 하게 된다. 고대 중국이나 인도, 그리스 도시국가간에는 어 느 정도의 국가간 규범체계가 성립되어 작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는 문명간 접촉이 적었기 때문에 종합적인 국제법 관계를 형성할 필요성이 적었다. 역내 국가간의 규범도 포괄적인 법률관계를 형성할 정도는 되지 못하였으므로, 오늘날의 국제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단편적인 내용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고대 국가간의 규범질서도 유럽에서 중세를 거치는 동안 단절되었고, 근대 국제법으로 직접 계승되지 못하였다. 유럽의 중세는 현대적 의미의 독립주권 국가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주권국가간의 법인 국제법이 발달될 토양 자체가 마련되지 않았었다. 각국의 군주는 대외적으로 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에 대하여 충성의무를 지는 반면, 대내적으로도 자국 영역에 대한 통제권을 영주와 공유하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군주는 동시에 타국의 신하로서의 지위를 갖기도 하였다. 대체로 중세 유럽의 국가관계는 가톨릭교에 입각한 느슨한 형태의 통일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고도 평가된다. 교황은 개별군주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를 가졌으 나, 개별 국가간의 법인 국제법의 제정자 역할은 담당하지 않았다.

국제법이란 법적으로 대등한 다수의 주권국가를 전제로 하여 성립되므로, 유럽 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출현과 궤를 같이 하여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이나 콜럼버스의 미주 대륙 진출과 같은 사건은 바로 국제법이 발달하게 된 시대적 배경 을 이룬다. 종교개혁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던 보편질서로부터 유럽을 해방시키고, 신교국과 구교국으로의 국가 분리주의를 자극하였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유럽국가 간의 국제법이 범세계적으로 적용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주권론”의 발달이 근대 국제법을 잉태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근 대 초기에서의 주권 개념은 군주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필요에서 발달되었다. 주권 개념은 유럽에서 종교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왕권에 대립하는 지방 영주의 저항 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안된 개념이다.

이를 최초로 체계화한 사람은 프랑스의 Bodin이었다. 그의 주권 개념의 핵심 은 군주는 누구의 동의 없이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의 주권 개념은 종교 갈등으로 인하여 지속적 내란상태에 있던 프랑스의 내부질 서를 안정화 시킴으로써 정치적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었다. 이 런 점에서 Bodin의 주권론은 대내적 개념으로 고안된 것이었으며, 주권 개념의 확 립과정은 절대주의 체제의 성립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데 군주가 자신의 영역 내에서 배타적 주권을 주장한다면 필연적으로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경계선이 어 디까지냐가 문제된다. 이에 주권의 대외적 측면이 대두되게 되었다. 8) 즉 상급자였 던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가 부인된 상태에서는 주권국가들의 관계가 평등하게 되었으며, 이들간의 관계를 규율할 규범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법질 서로서 등장한 것이 근대 국제법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과 같은 국민국가가 탄생하였다. 이들 국가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권위하에 있던 중세의 국가들과는 달리 대외적 독립성을 향유하는 완전한 주권국가였다. 근대 국제법은 이들 유럽의 주권 국가 상호관계를 규율하는 법질서로서 출발하였다. 특히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유럽에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교황의 권위 하에 있지 않은 신교국이 정식의 승인을 받았고, 국가는 교황으로부터 독립적인 존 재로서 자신의 의사만으로 외국과의 동맹 등 조약을 체결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 제 국가보다 상위에 군림하는 권위는 없어졌다. 대등한 지위의 이들 국가들은 상호작용을 통하여 유럽국가간의 공법- 국제법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근대 국제법의 이론적 맹아는 스페인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16, 17세기 스페인의 신학자들 중에는 후일 국제법 발달의 초석이 되는 사상과 이론을 피력한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은 도미니카 교단의 프란시스코 빗토리아였다. 신학자들의 큰 관심사 중의 하나는 전쟁이었다. 이들은 어떠한 전쟁이 정당한 전쟁 인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전쟁이란 국가간 관계의 비극적 절정이다. 이들은 전쟁 의 발발원인을 탐구하였고, 국가행동에 대한 합법성 판단에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 제법적 개념이 연구되었다. 또한 당시 스페인의 미주대륙 진출에 따른 이교도와의 접촉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도 국제법적 개념이 연구되었다. 스페인계 학자들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신학에 뿌리를 두고 현실의 세계에서 교황 에게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국가관계에서 발생하는 세속적 현상을 해석하기 위한 법개념을 제시하였고, 그것이 근대 국제법의 초기 발달에 기여하게 되었다. 결 국 근대 국제법이란 유럽 대륙이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정치 구조를 변형시킨 각종 시대적 변화의 소산물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주 된 관심주제는 전쟁, 해양법, 외교사절제도, 영토 취득 등이었다.

II. 근대 국제법학의 탄생

유럽에서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자리를 잡음에 따라 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규 •율하는 국제법이 학문으로서 체계적인 발달을 시작하였다. 빗토리아와 수아레즈 외 에 이탈리아의 벨리(Pierino Belli: 1502-1575), 스페인의 아얄라(Balthazar Ayala: 1584), 이탈리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약한 젠틸리(Alberico Gentili: 1552-1608) 등이 등장하며, 국제법을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법학 의 아버지로 네덜란드 출신의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를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로티우스(본명은 Hugo de Groot)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의뢰를 받아 1605 년 「포획법주석」이란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해양의 자유를 주장하였 다. 그로티우스는 이를 보완하여 1609년 「해양자유론」을 간행하였다. 불행히도 그 로티우스는 국내분쟁에 휘말려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옥하여 프랑스로 망 명하였다. 1625년 프랑스에서 그는 전 3권으로 된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의 법」 을 저술하고, 이를 루이 13세에게 헌정하였다.

30년 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그로티우스는 전쟁에 있어서도 서로 일정한 규칙을 준수하면 어느 정도 참화를 억제할 수 있으리라는 의도에서 「전쟁과 평화의 법」 을 집필하였다. 제1권에서는 주로 법의 연원에 관한 예비적 고찰을 한 후, 어떠한 정당한 전쟁이 존재하느냐에 관하여 일반적인 검토를 하였다. 제2권에서는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공권(公權)과 사권(私權)의 침해를 논하고, 정당한 전쟁의 원인에 관하여 분석하였다. 제3권은 전쟁중에 행할 수 있는 행위 및 전쟁을 종결시키는 조약에 관하여 논하였다. 그로티우스는 국가의 평등, 영토주권의 존중, 독립성 등을 지지하였고, 이 같은 개념은 웨스트팔리아 조약 이후 근대 유럽 정치질서의 바탕이 되었다.

그로티우스는 주로 자연법적 이론에 입각한 국제법을 전개하였다. 인간은 사 회성과 판단력을 가진 동물이며, 인간 고유의 천성은 질서 있는 사회에서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회적 본능과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자연법이 존재하며, 개인간의 관계에서와 같 이 국가간의 관계에도 자연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연법적 규칙이 국 제법의 기본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로티우스로 대표되는 초기의 국제법학자들은 대체로 자연법론에 입각한 국 제법관을 피력하였다. 자연법론자들은 모든 법은 정의의 원칙에서 나오고, 정의의 원칙은 범세계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법이란 제정되 기보다는 발견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각국의 실행에 근거한 국제법보다는 당위적으 로 있어야 할 법을 탐구하였다. 국제법도 보편적 자연법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이 들은 비록 국가가 제정한 법이라도 자연법 원칙에 어긋나는 법은 진정한 법이 아니 라고 보았다(Unjust law is not a really law at all. 다만 근대의 국제법학자들은 중세의 신학자들과 달리 자연법을 신의 뜻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모든 사람,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자연법을 국가의 군주와 국가관계에만 적용되는 새로운 국제법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사이에만 적용되는 체계적 법제도의 탄생이었다.

왜 초기의 국제법 학자들은 자연법론에 경도되었을까? 국제법학이 태동하던 근대 초엽에는 중세의 교권질서가 무너지고, 유럽에서는 신구교간의 종교전쟁이 한 창이었다. 신학이론에 바탕을 둔 법이론을 전개한다면 모든 국가가 수락할 공통의 법원칙을 제시할 수 없었다. 모든 국가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규칙을 만들기 위하여 는 종교적 가치와 분리된 법이론을 바탕으로 삼아야만 하였다. 이에 초기 국제법 학자들은 신학으로부터 분리된 영구불변의 자연법론에 입각한 국제법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국가의 준수를 기대한 것이었다.

국제법이 정의의 원칙에만 기반해야 된다면 국가의 대외관계에서는 법과 정책 을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주권자는 자신이 정의·이성·도덕에 합치되는 법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대외관계를 수행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란 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견될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법학의 발전은 불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이 차츰 종교전쟁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안정을 찾아 가자 법이론에 있어서도 변화가 왔다. 차츰 법이란 시와 장소에 따라서 또는 입법 자의 의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법이란 인간이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은 유럽에서 민족주의를 발흥시키고, 민주정치를 싹트게 만들었다. 민족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은 보편적 자연법론과 친하기 어려웠다. 민주정치의 확산은 대외관계에서도 개별 국가의 의사를 중시하게 만들었다. 각국별로 진행된 법전 편찬사업도 법을 보편적 정의관념에서 분리시키 고, 법이란 결국 개별국가가 제정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확산시키었다.

이에 18세기 초부터는 법학계에서 법실증주의적 입장이 확산되어 국제법에도 영 향을 미치었다. 법실증주의자들은 영구불변의 법원리에 입각한 국제법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국제법도 국가의사에 따라 제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주권국가는 자신의 동의에 의하여만 대외관계상의 제약을 받게 되며, 따라서 각국의 합의나 실행이 국제 법을 성립시키는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법실증주의적 국제법관을 확산시킨 초기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는 네덜란드의 Bynkershoek(1673-1743)가 있다.

법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국제법이란 근본적으로 국가의 의사의 부산물이다. 국제법이란 국가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합의를 통하여 창설되는 것이므로 국가간 의 합의가 없는 부분에 대하여 국제법은 침묵하여야 했다. 국제법은 국가 위의 법 이 아니라, 국가간의 법이라고 보았다. 국제법은 국가행동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일 뿐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국제법을 비정치화하였고, 도덕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국 제법이 전쟁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아 무력사용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였다.15) 법실증주의는 19세기 국제법학계를 지배하였으나, 다른 한편 국제법 에서 숭고한 이상을 제거하여 버렸고, 국제법을 권력에 종속된 편협한 기술적 성격 의 법으로 한정지우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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